[좋은수필]바람인형 / 박서연
바람인형 / 박서연
바람인형이 춤을 추고 있다. 빨간 옷을 입은 키가 4미터나 되는 바람인형이 좌우로, 위 아래로 유연하게 몸을 흔든다. 변두리를 비추던 태양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고 어둠이 내려와도 여전히 춤을 춘다. 모터가 윙윙거리며 바람을 공급한 탓인지 조금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인형 속에서 누군가 정말로 춤을 추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나는 눈을 감는다. 바람인형이 된 내가 서 있다. 천천히 두 팔을 벌려서 리듬을 타고 흔들어 본다. 발밑에서부터 스멀스멀 내재된 아픔들이 솟구쳐 오른다. 마음 깊숙이 쓸쓸함이 녹아들고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힌다. 친구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내 삶에 왜 내가 없지?”
물음표를 던지는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깊은 공명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결혼 후 30여 년간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그녀, 창밖의 세상엔 그녀의 꿈들이 유영하고 있다. 어젯밤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응급실을 다녀왔다며 한숨을 토해낸다. 친구의 공허한 목소리가 마음을 휘젓는다. ‘나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우린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한 채 서로에게 아픔을 내비치고 있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던가. 친구의 아픔도, 내 딸들도 책갈피 속에 묻혀버린 청춘을 애써 외면하고 날마다 책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세상은 아닌듯하다. 명료하게 보이지 않는 길 위에 기하학적으로 세워지는 이정표들. 그 앞에 서서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주체를 찾기도 어려운 현실. 고뇌하는 청춘들의 한숨소리가 아프게 들려온다.
꿈이란 건 지난 세월 속에 깊이 묻어 두었고 생존의 본능만이 일상이 되어버린 친구와 나의 어머니들.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채 자식들의 손길만을 기다리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부모와, 힘겹게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식들 사이에서 우린 어디쯤에 서 있는 것인지…. 어느 순간 내가 사라져 버린 삶. 어디에서 나를 찾아야 하는 걸까.
‘언제나 나의 적은 나 자신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어쩌면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패배라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앓이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건 아닐까. 가끔은 현실이 인식되지 않는 묘한 환상 속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속을 돌고 있는 바람은 어떤 것인지.
저 바람인형의 모터처럼 아이들과 어머니들에게 생생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고 싶다. 아이들이 자신들의 꿈을 찾아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세월 속에 묻힌 어머니들의 꿈도 한 조각 찾을 수 있다면. 접어두었던 내 날개도 다시 펼칠 수 있는 무한의 에너지를 만들어 줄 희망의 모터를 꿈꿔본다.
산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 꾸어야만 하는 꿈이 아닐까. 바람인형은 말을 건다. ‘나처럼 일어서봐, 이렇게 춤을 춰봐’ 바람인형을 따라 수많은 내가 상상 속 플래시몹(flashmob)으로 한바탕 물결을 만들어 낸다.
‘바람이 속을 채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춤을 출 수 있겠어?’ 바람인형의 말이 들려온다. 어느 순간 커다란 물음표와 마주친다. 내가 가족들을 위해 쉼 없이 바람을 만드는 것처럼 그들은 또 다른 나의 바람이었어. 따뜻한 느낌표를 본다.
아둔하게도 내 삶에 내가 다른 모습으로 서 있음을 보지 못했다. 힘차게 춤을 추도록 나에게 바람이 되어주는 사람들. 그 사랑의 동력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세워보자. 반쯤 구겨졌다가 두 팔을 활짝 펴며 다시 일어서는 바람인형을 따라 힘차게 일어선다.
나도 바람인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