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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모녀 행운목 / 최춘

cabin1212 2019. 9. 15. 06:42

모녀 행운목 / 최춘


 

 

분갈이를 했다. 푸르고 싱그러운 두 줄기의 나무. 몇 차례 수난을 겪고도 튼튼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고 기쁘다.

몇 년 전, 쉰 살을 훌쩍 넘긴 듯한 여인이 우리 집 아래층으로 들어왔다. 자녀들을 다 혼인시킨 뒤 혼자 온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흔일곱 살에 어렵게 낳은 초등학교 1학년인 딸 하나뿐이라고 했다. 아이는 헤어진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토요일에 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다시 갈 거라고 했다.

볕이 났어도 쌀쌀한 토요일 오후.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녀가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막 들어섰다. 나를 보자마자 아이에게 소개하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아이가 허리를 깊게 굽혔다 펴면서 큰소리로 인사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우리 엄마 딸이에요. 엄마 잘 좀 봐 주세요!”

뜻밖이었다. 가끔 젊은 부부가 입주하면서 아이들을 부탁했지만, 아이가 자신의 엄마를 잘 좀 바 달라고 부탁하는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아이 앞에서 긴장이 되었다. 그 마음 들키지 않으려고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으며 말했다.

예쁘게 생겼구나. 그냥 안녕하세요.’라고만 해도 돼.”

아주머니는 집주인이잖아요. 잘 좀 봐 주세요.”

동그스름한 얼굴에 분홍 원피스를 입은 아이. 그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잘 봐 드릴게.’라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도 나 좀 잘 봐 주라.”

고맙습니다.”

아이는 다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나는 아이에게 이름도 묻고 나이도 물었다. 그리고 학년도 물으며 서로 잘 지내자고 했다. 손도 마주 잡았다.

그 후 토요일 오후가 되면 삼 층 거실에서도 아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녀의 주고받는 이야기가 골목을 지나 대문 안으로 들어와, 마당에서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이어졌다. 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엄마와 만나는 시간을 아끼듯, 밝게 엄마를 부르고 또 부르며 안부를 확인했다.

엄마, 안 아팠어?”

엄마, 밥 잘 먹고 있었어?”

엄마를 두고 가는 일요일 저녁에는 부모가 자녀를 떼어놓고 집을 나서는 것처럼 애절했다.

엄마, 밥 잘 먹고 있어.”

나 보고 싶어도 참고 아프지 말고 잘 있어.”

어쩌다 나와 마주치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생글거리며 인사했다.

우리 엄마 잘 좀 봐 주제요.”

나는 아이에게 집주인한테 엄마를 부탁하는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마음 편히 살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마주치지 않으려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마당에 나가지 않았고 바깥 청소도 미뤘다. 옷자락이 보이거나 급히 나가려고 현관문을 열다가 아이의 기척이 나면 미동도 하지 않고 지나기기를 기다렸다.

아래층에는 여러 가구가 살지만 어린이가 없어서 항상 적막했다. 그런데 아이가 오는 토요일이면 골목부터 밝아졌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 다녀오는 것 같기도 하고 문방구에 다녀오는 것 같기도 한데, 어떻게 해야지 엄마 마음을 기쁘게 하여 웃게 할까 만을 헤아리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덕분에 마당 이쪽저쪽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어 어디선가 새가 날아들 것 같은 생기가 돌았다.

나는 마당에서 아이를 만나 칭찬을 하고 싶고 맛난 음식도 직접 주고 싶었다. 아이 엄마한테만 전해줄 수밖에 없었다.

두 해쯤 지났다. 아이가. 한 뼘 정도 되는 행운목을 가지고 왔다. 그가 가르쳐 준 대로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었다. 특별한 양분을 주지 않아도 앙증맞은 분() 속에서 순순히 잘 자랐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어린이를 보는 것처럼 대견하고 뿌듯했다.

어느 날 행운목이 자리 잡고 있는 분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보다 열 배 정도 큰 분에 옮겨 심었다. 쑥쑥 자라게 하려고 거름도 듬뿍 주었다. 거기에 비 맞고 볕을 쬐면 더 잘 자랄 것 같아서 밖에 내어놓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뾰족뾰족 나오던 새순 끝이 갈색으로 변하며 잘라지고 부스러졌다. 태풍에 삼 층 계단에서 마당으로 곤두박질쳐 화분이 박살나고 줄기가 꺾여 떨어져나가 나무토막만 남았다. 흙을 긁어모아 분에 담고 뿌리를 바로 잡아 나무를 세우며 가까이 대고 간절히 말했다.

잘 살아야 해!”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마른 나무토막에서 움이 텄다. 그리고 나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거름을 주지 않고 따가운 볕을 가려주었다. 항상 잘 살아주기만을 바랐다. 나들이할 때는 인사도 했다.

잘 다녀올게. 잘 있어.’

잘 다녀왔어. 잘 있었지.’

현관을 지키는 두 줄기의 행운목. 한 가지는 키가 크고 다른 한 가지는 키가 조금 작다. 큰 가지는 푸르고 건강한 잎들로 작은 가지에서 나온 잎들을 감싸 안은 모습이다.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잘 살아야 해.”

이제 그 아이 키만큼 컸다.

제가 웃어야지 우리 엄마도 웃잖아요.”

그 아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 아이 중학생이 되었겠다.

분 속의 흙을 다지며 모녀의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