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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리스본행 야간열차 / 허상문

cabin1212 2019. 10. 6. 05:30


리스본행 야간열차 / 허상문  

 

 

 

기다리는 열차는 쉽게 오지 않았다. 이국땅 어두운 역사(驛舍)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동안, 밤공기를 뚫고 뼈저린 여수(旅愁)가 비수처럼 늑골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연신 하품을 해대는 낯선 외국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간신히 올라탄 열차의 차창에는 쓸쓸한 어둠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차여행을 좋아한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것은 삶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창밖으로 어떤 풍경을 보고 있는가. 함께 가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나와 열차는 하나가 되어간다. 낮의 빛을 버리고 밤의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야간열차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인생에서처럼 열차를 타는 일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열차는 내가 원해서 탄 것이지만, 내려야 할 역은 멋대로 정할 수 없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내릴 수 있는 인생의 정거장은 많지 않았다. 때로는 정확한 목적지조차 모른다. 그저 어딘가로 가야 한다는 것, 마음대로 열차의 방향과 속도를 바꿀 수 없다는 것, 누가 운행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운명을 맡기고 실려 갈 뿐이다. 그런데도 열차에 몸을 의탁해서 흔들리며 어딘가로 떠나갈 때의 자유와 해방감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유럽대륙의 마지막 항구도시 리스본을 향하는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어둠 속 차창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고 창에 얼비친 처량한 나의 모습만 보인다. 늦은 시간 야간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은 먹먹해 온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한 줄기 빛을 남기며 어디론가 질주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환멸과 체념을 모두 내던지고 도피하는 길이다. 초로(初老)의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내의 절규 같은 소리를 지르며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야간열차에는 제국주의의 잔혹한 역사도 혁명의 꿈도 없다. 그저 나날의 삶을 고단하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깊은 시름과 한숨이 있을 뿐이다. 열차 안 어디에선가 누군가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역사는 역사, 인생은 인생, 한숨은 한숨···.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 모습은 언제나 슬프다. 시간은 흘러 차창 너머에 걸린 그믐달과 함께 사람들은 졸고, 몇몇은 별 내용도 없는 석간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다.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고,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걱정하면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뜬다. 야간열차에는 얼룩지고 피곤한 표정의 사람들이 세상 끝까지 가보겠다는 듯 좁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구겨 넣고 앉아 있다. 창밖의 어둠을 내다보며 눈물로 방황하던 시간을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쓸쓸함의 체취는 더욱 진하게 전해온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모두 속울음을 삼키고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인 것 같지만 영원히 하나일 수 없다.

가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차창에 어른대는 얼굴과 어둠만 바라보면서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론 술에 취한 듯 산다는 것이 즐겁고 흥겨웠지만, 때론 피를 토하듯 힘겹게 살다가 귀향하는 탕자(蕩子)의 마음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고 싶은 말보다는 듣고 싶은 말이 더 많은 시간이다. 우리는 그저 흘낏흘낏 서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모두 외로운 혼자였다.

야간열차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갈 때는 자꾸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나가던 기나긴 여정 속에서, 바라나시의 갠지스로 달려가던 인도의 새벽열차에서, 사라진 잉카 족을 만나기 위해 마추픽추로 향하던 협궤 열차에서, 나는 늘 많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하나가 되어 흔들대면서 인간에게 운명이란 무엇이며 삶에서 우연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계속한다. 벼랑 끝에 몰린 짐승처럼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힘들게 달려가는 야간열차는 삶이 무엇인지 운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흔들대며 자꾸 묻는다. 열차는 거친 숨만 내쉰다.

인생은 그랬다. 무언가 열심히 계획해 두면 그것은 엉뚱하게 뒤틀어지고, 우연은 운명처럼 갈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면서 펄펄 끓던 젊은 시절의 생생한 떨림은 마른 명태같이 시들어 갔다.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것일 뿐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생각한 대로 계획한 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인생은 제멋대로였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가 뜻밖의 우연으로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가 남긴 책과 승차권을 들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는 거와 같이.

우리는 인생을 다 아는 척하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기나긴 삶을 살고 많은 경험을 했다지만,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나마 껍데기일 뿐, 그 심연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책을 통해서 혹은 삶을 통해서 힘들게 얻은 지식과 경험이 빙산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라면, 나머지는 얼마나 긴 항해 후에 알게 될 것인가. 한 생이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는 지금까지 알 수 없는 것을 대체 언제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 순간은 엄숙하고 거창한 교향곡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몰래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믿을 수 없는 우연으로 찾아온다. 진정한 인생의 연출자는 우연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언제 인생이 우리에게 친절하게 갈 길을 알려준 적 있던가. 인생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산다고 상상하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여행지에서 만나는 낯선 세상의 모습, 사람, 사건은 모두 우연의 연속일 뿐이다.

다시 지도를 꺼내 놓고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나게 될 저 세상과의 우연을 생각해 본다.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인생은 거의 끝나 가는데,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그의 영혼도 남의 것인 양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영혼의 떨림 없이 사는 것이 어찌 진짜 삶이 될 수 있는가. 태워라 모두 태워라. 무엇을 주저하고 무엇을 아까워하는가. 이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목젖 떨며 뜨겁게 울어라. 한번 떠난 열차는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꾸불거리고 덜컹거리는 열차의 복도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내가 서 있는 자리와는 다른 곳이다. 둘 사이에는 다른 불빛이 비치고 있다. 불빛은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 해가 뜨고 낮이 되었다가 황혼이 오고 밤이 왔다. 사람들은 모두 다른 시간에서 다른 삶의 불빛을 바라본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폭풍이 몰아친다. 사람들은 다른 처마 끝에서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행복과 불행을 느낀다. 열차가 정차한다. 사람들은 어디에 정차했는지 보려고 창밖으로 목을 내민다. 정차한 역에는 이정표가 없다. 길 잃은 영혼들은 갈팡질팡한다.

우리는 모두 일그러지고 상처받은 영혼이다. 누군가에게 주는 믿음, 변치 않을 것 같은 우정과 사랑, 무언가를 위한 강렬한 열망, 이 모든 것은 결국 깨어지고 버려진다. 우리는 모두 끝내 도망치는 그림자 같은 영혼을 지니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저무는 이맘때 돌아보면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을, 손 내밀어 잡아 줄 수도 없다. 모두 벽 속에 갇히거나 물이 되어 숨죽여 흐르고 있다. 둘러봐도 새로이 맺을 인연도 없고, 팍팍하고 헐벗은 잿빛 가슴에 더 담을 푸른 희망도 없다. 그립고 아쉬운 시간을 호명하며 회한의 눈물을 차창 밖 어둠으로 던졌다.

이제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그리움도 아쉬움도 다 뒤로 하고 열차는 어딘가에 멈출 것이다. 가기로 작정하면 열차가 잠시 멈춘들 무슨 문제이겠는가. 열차는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고, 시간은 영원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밤 새워 열차와 함께 앞만 보며 달려왔지만, 어느 곳을 지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이제 곧 종착역에 닿을 시간이라는 것을 알 뿐이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고 답한 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침내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종착역에 도착한다. 사람들은 분주한 발걸음으로 제 갈 길을 재촉한다. 밤새워 열차가 달려 온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열차와 함께 지나온 곳에는 내 경박한 실존의 흔적만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을 것이다.

어딘가를 떠돌다 또 다른 우연을 만나기 위해 열차에 몸을 싣는다. 새로운 여행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