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툭툭툭 쿵쿵쿵 / 우종률

cabin1212 2020. 1. 14. 06:53

툭툭툭 쿵쿵쿵 / 우종률

 

 

 

툭툭툭

토실토실하고 반질반질한 것이 움칠움칠하더니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떼구르르 굴러간다. 잠시 낙엽 위에 앉더니 다시 달아난다. 낙엽과 동색이다. 설핏 봐선 구분이 가지 않지만 도토리는 조금 더 빛난다. 뒤채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잠포록한 날이면 도토리는 안간힘을 써야 한다. 어차피 혼자서 할 일이지만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발가락 끝까지 힘이 들어간다. 낙엽들이 밑에서 받으려다 그만 놓쳐버릴 때도 있다. 금이 간다. 옆구리가 아프다.

열매를 맺으려고 그는 수십 년을 기다렸을 일이다. 떨어져서는 또 다른 탄생을 위해 땅속에 숨으려는 것이다. 대지의 젖가슴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 애벌레처럼 웅크려 있어야 한다. 그러다 싹이 나오면 비로소 키 재기가 시작된다. 성년이 될 때까지 겪어야 할 또 다른 고독을 생각하면 애초부터 방해는 말아야 할 일이다. 그의 추락을 인정하며 모르는 척 자리를 피해야만 한다. 이 위대한 의식 앞에 바라보는 자는 미물일 뿐이다. '툭툭툭' 비로소 아침이 열린다.

 

쿵쿵쿵

자연의 소리가 아니다. 표피 곳곳에 붉은 상처가 난다. 나무는 참으려고 하지만 흘러내리는 피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다. 더 이상 자국이 번지지 않게 눈물로 치료해야 한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태백산의 말라가는 주목처럼 허물을 벗고 있는 나무의 마른버짐. 겨우 뿌리만 지탱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렇게 해가 몇 번 바뀌면 지나가는 산토끼가 뒷다리로 건드리기만 하여도 맥없이 쓰러지는 신세가 되고 만다. 영원을 꿈꾸던 잎과 가지들은 비참하게 죽어간다.

사내 둘이 돌과 망치로 참나무를 내리치고 있다. 흔들리는 건 나무만이 아니다. 산비둘기는 안타까워 '-' 대다 숨을 죽이고 산까치는 '안 돼, 안 돼.'를 외치며 계속 퍼덕이고 있다. 그들은 발아래 떨어지는 채 익지도 않은 열매들을 보고 신이라도 난 듯 더욱 세게 나무를 때린다. 온 산이 흔들린다. 자연의 교향악은 일시에 정지한다. 함초롬하게 아침이슬 머금은 이파리들 사이로 일렁이는 바람, 중간 중간 울리는 도토리의 낙하는 트라이앵글처럼 얼마나 적절한 삽입음인가. 그들을 찬양할 숲의 조화가 깨진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바람마저 숨을 멎고 있다. "쿵쿵쿵" 탁음이다.

…….

아침이면 다가와 닫힌 영혼에 용기와 꿈을 실어주는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그 음을 따라 산길을 올랐다. 좇아가다 길을 잃어도 좋았다. 유년시절 소독차를 따라가다 오리무중이던 이웃 동네처럼, 아침 산의 소리는 날마다 낯설었다.

오늘은 낌새가 이상하다. '툭툭툭'이 아니라 '쿵쿵쿵'이다. 둔탁한 소음 속에 모든 것이 묻혀 버리고 있다. 번뜩이던 사내들은 자기 욕심보다 더 큰 도구를 들고 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질러대는 비명쯤은 듣지도 않는다. 지나칠 수 없어 다가간다. 눈을 부라리며 곧 칠 기세다. 이미 그들에겐 나 또한 자기들의 발밑에서 흔들리는 한 그루의 참나무로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다. 참나무는 쥐고 흔들기만 해도 심한 몸살로 이듬해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수십 년을 자라 온 나무들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

떨어진다고 모두가 참나무가 될까. 도토리는 다람쥐, , 청서, 노루, 멧돼지 등 야생동물의 겨울 양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도토리만 보면 주머니에 주워 넣기 바쁘다. 이리저리 굴리다 결국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귀찮아서 버리는 도토리 몇 알이 산짐승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 벌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상처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를 맺게 꽃을 도와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참나무에게 되레 깊은 상처까지 주고 있다. 더 참을 수 없는 굶주림 산짐승들은 이젠 집으로까지 내려와 해코지를 한다.

산은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낙엽 속을 헤집고 싹이 올라올 도토리를 애초에 기대해 왔던 내 정서가 부끄럽다. 이 계절이 다 갈 때까지 숲에선 '쿵쿵쿵', 참나무의 신음소리만 소소蕭蕭하게 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