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후박나무가 있던 자리 / 허상문

cabin1212 2020. 1. 18. 07:04

후박나무가 있던 자리 / 허상문

 

 

 

오랜만에 제주 오름의 숲길을 걷는다. 온천지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단풍은 져서 낙엽이 되었다. 올해도 이제 곧 겨울의 삭풍과 추위가 닥쳐올 일이 남아있고, 또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 속으로 한 해를 보내야 할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힘들게 찾아간 숲속 깊은 분화구에는 몇백 년은 족히 됨직한 후박나무가 단정하면서도 웅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후박나무는 그 이름대로 후덕한 품새로 산과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 아래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을 푸르게 만든다.

나무는 저 자리에서 얼마나 수많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왔기에 저리도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한 톨의 작은 씨앗이 대지에 몸을 기대어 뿌리를 내리고, 저렇게 가지 무성한 잎새들을 내밀기까지 얼마나 긴 풍상을 참아왔을까. 나무와 그가 선 자리와 세월에 절로 머리가 숙어진다. 지난여름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했던 폭염도 나무 그늘은 시원하게 식혀주었을 것이다. 그뿐인가. 지나가는 바람과 새들에게도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고 노래를 들려주었을 나무의 덕을 바라본다. 그저 몸만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몸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는 헌신의 깨우침을 나무는 일러준다. 나무는 인간같이 어딘가로의 등정登頂이나 정복을 하지 않는다. 살며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이 시간마다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갈 뿐이다.

나무는 인간에게 서늘한 그늘과 푸른 마음을 주지만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은 봄에는 산나물을 뜯기 위해서, 가을에는 밤과 도토리 같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숲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그냥 재미 삼아 한둘 줍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차고 흔들어 송두리째 쓸어가야 직성이 풀린다. 낙엽 사이로 부끄러운 듯 귀엽게 얼굴을 내밀고 있던 도토리를 언제부터인가 보기 힘들다.

숲속 어딘가에서 다람쥐들도 벌써 겨울 채비를 하는 듯 분주히 움직인다. 사람들이 밤과 도토리를 독차지하기 전에 그들도 겨우살이를 준비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에 맞서겠다는 듯 다람쥐들이 경쟁도 만만치 않다. 다람쥐는 자신이 먹을 양의 몇 배나 되는 도토리와 밤을 모아서 여기저기 땅속에 숨겨둔다. 그러고는 어디에 숨겨 두었는지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혹이 이것이 인간으로부터 배운 탐욕이라는 잘못된 가르침 탓이나 아닌지.

그나마 땅속에 묻어둔 다람쥐의 욕심은 거름이 되거나 나중에 다시 태어나 싹이 될 것이기에 크게 탓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욕심에는 나머지라는 것이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못 먹을지언정 끝까지 가슴에 부둥켜안고 있으려 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호랑이와 사자는 닥치는 대로 짐승들을 잡아먹는 먹성을 지니고 있지만, 인간의 먹성도 이에 못지않다는 생각이 든다. 짐승들은 자신이 먹을 양을 어느 정도 채우면 건강을 위해 절제도 한다지만, 인간은 과잉의 영양분이 몸에 축적되어 건강에 이상이 생겨도 중단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언론매체에는 온통 먹는 방송뿐이다. 대체 얼마나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먹는 즐거움을 억제치 못하는 것은 물론 자동차와 집과 돈에 대한 욕망도 절제치 못한다.

선조들은 보릿고개를 감수하면서도 감이나 대추를 따면서 '까치밥'은 꼭 남겨 두었다. 또한 기르는 소나 말을 단순히 재산이나 일 시키는 대상으로서만이 아니라 동료로 여겼다. 어린 시절 외가에 갔을 때 할아버지는 논과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시면 아무리 다리가 아파도 일부러 소달구지에 몸을 싣지 않고 걸어오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비록 말 못하는 짐승들이지만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소중한 마음들이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다시 활짝 피어날 수도 없고 날 수도 없이 한 생을 마쳐버린 마른 낙엽 위를 사각사각 소리 내며 걷는다. 이 낙엽이 모두 돈이 되거나 황금으로 변해 버린다면, 사람들은 돈으로 변한 낙엽을 쓸어 모으기 위해서 또다시 엄청난 전쟁을 치를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자나 깨나 돈타령이다. 돈 때문에 광분해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돈이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다.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모두 돈으로 얻을 수 있다. 돈의 중요성이 뼛속까지 스며들게 된 이런 현상이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다. 도심의 네거리에 서서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저들이 모두 돈 때문에 저렇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의 물화된 세상이라 하지만 사람들은 돈을 생명으로 여긴다.

낙엽이 이렇게 낙엽으로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얼마나 큰 다행인가. 그래야만 우리는 내년에도 그 후에도 후손들이 숲길을 걸으면서 생명과 가을의 소중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산채로 제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을 하고 이어야 한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억압과 폭력의 비 생명성과 비인간화는 자연에서마저도 예외가 없다. 숲 곳곳에 '출입금지' 'CCTV 촬영 중'이라는 협박성 경고 문구와 곳곳에 쳐진 철조망을 바라보면서, 자연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삭막하고 황폐해져 간다는 참담함을 느낀다. 먼 훗날,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인간이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저 나무 아래 한 줌의 흙이 되어 묻히고 말 것인데.

가을이면 무서운 절망감이 다가온다. 모든 것이 시들기 때문이다. 모든 잎사귀가 땅으로 떨어진다. 인간이니 늙어서 병들과 시들어 죽는다. 식물은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썩은 나뭇가지에서 봄이면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고 싱싱한 초록이 되어 나타난다. 나무와 잎이 썩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잠지 정지하는 것이지만 인간은 썩어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 인간에게는 한번 지나가면 봄이 없지만, 식물들은 지나간 시간을 이기고 새로이 태어나 젊어진다. 다시 태어나고 젊어지는 식물이 너무나 부럽다. 그래서인지 식물들은 시들어도 울지 않는다. 머지않아 봄이 오면 그들은 젊어진다. 식물은 죽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지니고 있다.

신비로운 부활이 인간에게는 왜 없는 것인가. 그래서 인간은 저렇게 탐욕하고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식물은 옛날의 모습, 혹은 앞으로 되어가야 할 모습을 꿈꿀 수 있다. 식물은 우리가 가장 소원하는 영원을 꿈꾸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성과 이상으로 최고의 삶을 꿈꾸지만, 종국에는 허무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은 열심히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기술과 자본의 질서는 땅의 질서와 대립한다. 나무와 도토리는 자연과 땅의 질서가 만든 산물이다. 자연은 분별과 차이를 모른다. 서로 다툴 일이 없으므로 만물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욕심 없이 시비 없이 서 있게 된다. 인간과 나무, 다람쥐와 도토리가 모두 제 자리에서 욕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갈 때, 이 세상은 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생명의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늦어진 가을 숲은 금세 바람이 차고 숨어있던 낮달도 사라지고 없다. 더는 산속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이제 서둘러 산을 내려가 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후박나무 곁에는 또 다른 손님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