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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임기응변(臨機應便) / 조이섭

cabin1212 2020. 1. 20. 06:56

임기응변(臨機應便) / 조이섭



 

 

5월 어느 화창한 토요일, 달리기 모임이 있었다. 직장동호회에서는 봄가을에 경치 좋은 곳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참석하는 것이 연례행사였다. 올해는 사정이 생겨, 오전에 대구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하천인 신천 변을 달리고, 가까운 우록유원지로 봄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일부 젊은 직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아이들은 이미 엄마아빠를 따라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 메달을 여러 번 목에 걸어본 적이 있는지라 저희끼리 모여 장난치고 놀고 있었다. 아이, 어른 합해 서른 명이 훨씬 넘었다. 간간이 산책하러 나오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지도자 구령에 맞추어 몸을 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에구구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이 달리기 동호회지, 일주일에 한 번 퇴근 후에 운동장 트랙을 도는 모임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지 않는 회원이 대부분이었다. 강도 높은 스트레칭을 신음 없이 따라 하기는 애당초 틀린 일이었다. 나도 5km 달리기로 시작하여 10km만 열댓 번 완주했을 뿐, 하프 마라톤을 뛰어본 경험도 없는 아마추어였다. 그마저도 웬만한 여직원보다도 못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두말할 필요 없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른 아침, 앓는 소리로 만든 불협화음이 신천 하늘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실전보다 힘들게 준비운동을 마치자 출발신호가 울렸다. 동신교 아래에서 출발하여 다리 몇 개를 지나 상동교를 반환점으로 하는 7~8km 구간이었지만, 각자의 기량에 따라 힘에 부치면 그 자리에서 되돌아올 수 있는 헐렁한 코스였다. 출발하자마자 프로에 버금가는 회원들은 저만치 앞서 나갔다. 나머지는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를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실력이야 그렇지만, 옷차림 하나만은 올림픽 마라톤 선수 못지않았다. 대회 참가 때 기념품으로 받은 울긋불긋한 셔츠를 입거나, 단체로 맞춘 팬티 옆 단과 민소매 상의 등판에는 영문 이름 머리글자까지 선명하게 박힌 유니폼을 갖춰 입었다.

다리 근육이 서서히 풀리고 호흡이 고르게 되어 속도를 붙이려고 하는데, 아뿔싸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마침, 간이 화장실이 보였지만 아침에 집에서 변(便)을 처리하고 나왔기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그런데 두 번째 다리인 대봉교를 조금 지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아픈 정도가 아니라 속이 부글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제 밤늦도록 술을 마신 탓이라고 후회를 해 본들, 사후약방문이요 버스 떠난 후 손 흔들기였다. 고개를 길게 빼고 간이화장실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까 지나쳤던 간이화장실로 되돌아가기도 마뜩잖아서 죽으나 사나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실, 처음 뱃속의 이상 신호를 감지했을 때부터 뛰기를 포기하고 걷고 있는 참이었다. 여자 회원들이 추월해 갈 때, 지나쳐 가라고 손짓하며 짐짓 웃어 보였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 회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부글거리는 속사정을 어떻게든지 해결을 해야만 했다. 갈겨니와 가물치가 노는 왼쪽 신천 강물에 뛰어들지도 못하고, 개활지나 다름없는 그늘막(pergola)의 벤치 뒤에 숨을 수도 없었다. 오른쪽 축대 가까이에 나란히 심은 개나리가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나리꽃이 만발하여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었다.

노란 꽃이 지고 연녹색 이파리가 제법 돋아난 덤불 가까이 다가가 안쪽에 빈 곳이 있나 살펴보았다. 개나리가 우거진 데다 축대와 너무 붙어있어서 도저히 궁둥이를 들이밀 처지가 아니었다. 다른 곳을 물색하려고 걸음을 떼려는 순간, 금방이라도 둑이 무너질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마침, 주위에 사람들이 뜸했다.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내 눈에 안 보였을지도 모른다. 개나리 포기와 포기 틈새로 돌진했다. 바지 내리고 쪼그리고 앉는 동작은 동시였고, 0.1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누런 액체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단 한 번의 분출이 시작이자 끝이었다. 속이 편안해지고 무지근하던 부분도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아까는 몰랐지만, 막 올라온 이파리를 듬성듬성 매단 가느다란 가지 몇 개로 하얀 엉덩이를 감싸기는 한참 모자랐다. 어쨌든 이제 은밀한 뒤처리만 남았다. 호주머니에는 마침 휴지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개나리 가지가 흔들리지 않게 앉은 채로 마무리하고 바지를 추슬렀다. 잔뜩 쪼그리고 앉아, 바깥의 낌새를 살피다가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틈에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그 바람에 물에서 놀고 있던 고방오리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하필 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이 녀석들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다가 무안을 주는 것 같아 괜히 머쓱해졌다.

우레탄 보행로에 들어서서 양손을 허리에 얹고 목운동을 하는 척하다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뛰지도 않아서 벌써 선두 주자들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뒤이어 어린이와 직원들이 무리 지어 오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골인 지점을 함께 통과했다.

임기응변이란 그때그때 처한 사태에 맞추어 즉각 그 자리에서 결정하거나 처리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나는 그날 臨機應變이 아니라, 臨機應便을 제대로 한 하루였다. 때맞추어 제대로 처리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30년 직장생활을 황금색 구설수로 칠갑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