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혹 / 박월수

cabin1212 2020. 1. 24. 07:23

/ 박월수

 

 

 

놈은 오랜 시간 내안에 기거했다. 나는 녀석에게 들어와 살라고 말한 적 없다. 진즉에 쫓아내지 못한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알갱이로 내 팔뚝에 똬리를 틀었던 까닭이다. 어느 날 문득 도드라진 무언가가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내 눈에 띄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눈길조차 피하고 무심한 척 버려두면 물사마귀처럼 사라질 줄 알았다.

녀석은 집세도 안 내고 덥석 들어앉았지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남의 살에 침범했는데도 통증이란 걸 데리고 있지 않았다. 그만하면 그리 미울 것도 없었다. 병원 가는 일이 죽기보다 귀찮은 맘도 한몫했다. 동거를 허락하기로 했다. 주인의 마음을 읽었으면 녀석도 납작 엎드려 있어야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야금야금 제 몸뚱일 키워갔다.

부랴부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척 보기만 해도 안다는 듯 별거 아니라고 했다. 꾹꾹 눌러보더니 아프지 않으면 좀 더 키워서 오라고 했다. 더 이상 자라지 않고 같은 상태로 있다면 굳이 떼어낼 필요가 있겠냐고 했다. 녀석을 잘 달래서 데리고 사는 편이 팔뚝에 칼자국이 남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럴 것 같았다.

커피 잔을 든 팔을 다른 한 손으로 만지는 버릇이 생겼다. 수시로 커피를 마셨으므로 수시로 혹을 어루만졌다. 친절한 유모처럼 마음을 쏟았으나 녀석은 사라지지도 가만있지도 않았다. 땅따먹기 하는 아이처럼 조금씩 제 영역을 넓혀갔다. 한 손 가득 들어차는 녀석은 누가봐도 혹이었다. 얇은 옷을 입으면 툭 불거진 팔뚝이 자연스레 눈에 띄었다. 더 미루다간 축구공만 하게 자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좀 더 오래까지 여자로 있고 싶었으므로 미관상 어떤 것이 보기에 덜 흉할지 결정해야 했다. 이제 그만 녀석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리기로 했다.

철면피 입주자를 떼어내는 데 온갖 귀찮은 일이 많았다. 퇴거를 주관할 곳을 도시의 큰 병원으로 잡은 것부터 문제였다. 몸에 칼을 대야 한다는 부담감이 다니던 가까운 병원을 밀어냈다. 처음으로 무덤 속 같은 상자에 들어가 자기공명영상이란 걸 찍었고 간과 팔뚝의 초음파를 찍었다. 그러는 동안 병원을 드나든 횟수는 수도 없이 많았다. 겨우 떼어낼 날짜가 잡혔는데 병원이 파업했다. 무단침입자는 방세를 내기는커녕 시간과 돈을 뭉텅이로 빼어갔다.

녀석은 끝가지 민폐를 끼쳤다. 퇴거가 지연되어 미적거리는 동안 덩치를 더 키운 모양이었다. 담당의는 떠나는 녀석을 보며 전송을 해도 좋다고 했던 말을 바꾸었다. 주인이 완전한 무의식 상태에서 침입자를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고 했다. 나는 녀석과의 작별을 위해 이별 엽서처럼 금식 팻말을 달고 하루를 보냈다. 종지만 한 위를 가진 터여서 배고픈 건 참을 만했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을 때 녀석은 내게서 떠나고 없었다. 소독을 위해 녀석이 머물다 떠난 자리의 덮개를 열었을 때 길게 그어진 세로줄 하나가 나를 참혹하게 했다. 푸른 멍을 둘러싸고 산처럼 부풀어 오른 팔뚝엔 한 뼘이나 될 듯한 칼자국이 나 있었다. 녀석을 보내는 동안 문밖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일이 내내 쓸쓸했는데 녀석이 남긴 이별 인사는 그보다 더 아렸다. 파란 옷을 입고 매스를 든 퇴거 집행관들과 연이라도 있었다면 녀석이 떠난 자리는 흔적이 덜 했을까.

짚어보니 지방종이란 이름을 가진 혹뿐이 아니었다. 달콤한 향기를 뿜으며 달려들던 바람처럼 대책도 없이 나를 비집고 들어왔던 것들은 언제나 처음 모습으로 머무르진 않았다. 내 안에서 마음대로 제 몸피를 키우며 고요하고자 하는 내 영혼과 실랑이를 했다. 그러한 관계를 다독이느라 마음은 자주 수선스러웠다.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는 흉터를 내려다본다. 마음 안에 그득 쌓인 보이지 않는 혹들도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을까. 저 혼자 다가와 켜켜이 쌓인 인연들을 곱게 갈무리하고 편안하고 고독한 영혼을 지닐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수작이란 걸 안다. 눈 떠 있는 동안은 그들과 숨결을 나누며 부대껴야 한다. 안았다가 놓는 일을 거듭해야 한다. 범이 담배를 피우고 곰이 막걸리를 거르던 그때부터 인간은 혼자가 아니었으며 생은 머물러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