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못을 박다 / 정선모

cabin1212 2020. 1. 26. 07:02


못을 박다 / 정선모

 

 

 

엄지손가락이 아직도 아프다. 못을 박다 망치로 맞은 탓이다. 그림 한 점 걸려고 벽에 못을 박으려다 그만 손을 찧고 말았다. 벽이 어찌나 단단한지 못이 자꾸만 튕겨나갔다. 못이 튕겨나간 자리마다 구멍이 생기고 망치 자국이 남아 깨끗하던 벽에 보기 싫은 흠집이 생겼다. 어찌어찌 하여 겨우 못을 박곤 빠질 세라 조심조심 그림을 걸었다. 다행히 보기 흉한 못 자국은 가려졌지만 그렇다고 이미 생긴 흔적이 사라진 건 아니니 내심 찜찜하다. 그림을 볼 때마다 가려진 못 자국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가끔 집을 허문 곳에서 나오는 나무들을 잔뜩 가지고 오셔서는 오라비들에게 박혀 있는 못을 빼라고 시키셨다. 오랫동안 나무에 박혀 있던 못은 녹이 슬어 잘 빠지지 않아 오라비들을 꽤나 애먹였다. 그 나무들은 대부분 땔감으로 쓰였는데 그냥 불에 던져 넣으면 될 것을 왜 힘들게 못을 빼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어느 날, 메주콩을 삶느라고 온 집안이 분주하던 때였다. 가마솥에 삶고 있는 콩을 한 숟가락씩 떠먹는 재미로 부엌을 들락거리는 나에게 아궁이에 장작을 집어넣으라는 일이 주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불 때는 걸 좋아하는 나는 뒷마당에 쌓여 있는 나무들을 한 아름 안아다가 부엌에 던져놓곤 아궁이에 하나씩 던져 넣었다. 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모습처럼 보기 좋은 게 또 있을까. 제법 굵은 나무토막이 온통 불길에 싸여 한 줌 재로 변하는 모습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옆에 있는 장작을 집어 드는 순간 뼈를 찌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미처 빼지 않은 못이 내 손을 깊이 찌른 것이었다. 집안이 떠나갈 듯이 울어대는 나를 보고 메주를 만들던 식구들이 놀라서 달려왔다. 여린 내 손은 피로 흥건하였다. 파상풍에 걸릴까 걱정된 아버지는 날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아직도 그때의 흉터가 손바닥에 남아 있다. 그 날 저녁에 오라비들은 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났다. 꼼꼼히 살펴보고 못을 빼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못에 찔리는 것도 문제지만 못이 불에 달구어지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일 이후로 그렇게 좋아하던 불 때기를 한동안 할 수 없었다.

오라비가 애써 빼놓은 못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버리지 않았다. 구부러진 못은 살살 펴서 크기대로 담아놓곤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썼다. 못 통에 들어 있던 못은 크고 굵은 대못부터 작고 가느다란 못까지 크기도 다양했다. 그렇게 모아진 못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반듯한 새 못에 비해 꽤나 볼품없어 보였다. 오라비들은 못 박을 일이 생기면 늘 새 못을 썼다. 그러나 목수였던 아버지는 헌 못이 들어 있는 통을 자주 열었다. 박힐 곳의 성질을 파악하곤 살살 못을 달래며 망치질을 하여 오라비들보다 훨씬 빨리 일을 마치셨다. 오라비들은 새 못을 가지고도 여러 번 박다 빼다 하였지만 아버지는 대부분 한 번에 못을 박으셨다.

그 당시 아버지가 오라비들에게 거듭거듭 당부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제대로 살펴서 한 번에 못을 박아라. 한번 잘못 박으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 법이란다. 그 흔적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힘이 좋다고 못을 잘 박는 게 아니다. 힘으로만 망치질하다 만들려던 것을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느니라. 망치질을 잘못하여 삐딱하게 박히면 그 못은 오래도록 그런 모습으로 지내야 한단다. 못이 왜 구부러지는지 아느냐. 그건 전적으로 망치질하는 사람들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들 가슴에 못 박을 일은 애당초 하지 말아야 하느니.

이 나이가 되도록 못 박기에 서툰 나는 아픈 엄지손가락을 다른 손가락 안에 슬그머니 숨겼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음성이 쩌렁쩌렁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