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봄 갯벌 / 최아란

cabin1212 2020. 2. 14. 07:31

봄 갯벌 / 최아란

 

 

 

깜빡했던 일이 생각난 듯 봄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날엔 사위가 고요하다. 정교한 눈 결정체 안에 소리가 갇혀 그렇다던가. 그럼 눈을 잘게 바스러뜨리면 갇혔던 소리들이 석류알처럼 와글와글 쏟아져 나올 것인가. 한 줌 눈이 붙잡은 소리래야 그 눈이 손바닥 온기에 녹아 똑똑 떨어지는 소리보다 작을지 모른다. 하지만 앞산과 뒷산, 역전 큰 도로와 오솔길, 아파트 수십 동을 뒤덮은 눈이라면 움켜쥔 소리의 양도 대단할 것 아닌가.

그럼에도 햇살이 여러 날 공들여 얼음 포박을 풀어준 소리들이 사방으로 탈출하는 걸 듣지 못하는 까닭은 그보다 더 큰 소리가 세상을 뒤덮기 때문이리라. 질퍽한 흙길을 밟고서라도 산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 나무들이 허겁지겁 물을 들이켜는 소리, 오리털 잠바와 털장갑이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소리, 부푼 땅 위로 개미와 아기들이 놀러 나오는 소리 같은 것 말이다.

썰물처럼 겨울이 빠져나가면 소란스러운 봄 갯벌이 펼쳐진다. 어둡고 찐득한 땅에서 푸르고 여린 생명들이 발차기를 한다. 보도블록 사이 손톱만 한 땅에서도 초록색이 기지개 켜는 것이 보인다. 자취를 감췄던 길고양이마저 도도히 활보를 시작한다. 엄마 품에서 찐 고구마 야금거리던 아기도 꼬까신 신고 놀이터에 당도한다. 그새 쌕쌕 자고 먹고 놀기만 했는데 어찌 이리도 다리 힘이 올랐는지. 독한 환절기 질병과 황망한 비보들을 떨쳐낸 할머니들도 다시 산책길에 나선다. 눈길 닿는 곳마다 생이 촘촘히 박힌 풍요로운 갯벌이다. 어디에 숨어들 있다가 이토록 한날한시에 나타난 것일까.

찬바람 불기 전, 알곡 가득한 가을 밀물이 천지를 덮었을 때 세상에 스며들었다가 겨우내 긍정을 훈련했던 부지런한 시절 덕분이리라. 피고 졌으되 다시 필 것을 의심하지 않는, 긴 밤보다 더 길고 질긴 믿음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미련한 믿음은 기어이 희망을 끌어들이고야 만다. 칠 년 동안 둘째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 쓰던 때에도 그랬다. 불안이 들불처럼 번지다가도 씨앗만한 믿음이 그 모든 것을 불러 세우곤 했다. 땅속에서든 어디에서든 더디더라도 미련하더라도 건강하게 기다려준 생이 용하고 고맙다. 이토록 찬란하게 돌아와 주어 고맙다.

가까운 외출에도 자동차 배기가스를 뿌리고 다닌 나에게까지 봄이 와주었다. 톡톡한 봄옷을 꺼내 입고 달랑이는 귀걸이를 찬다. 목도리 올에 걸려서 그간 못하던 디자인이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어두고 미나리를 무친다. 짐처럼 버거웠던 두툼한 아기 겨울 바지도 빨아서 따로 챙긴다. 아마도 다음 겨울에는 작아서 입지 못하리라. 홑바지 새 바지를 입은 아기는 중력을 거스른 채 하늘을 향해 동실 솟은 목련 봉오리처럼 가볍다. 봄이 스스로 써내려간 미문에 감탄사만 이어 붙여 글도 한 편 쓴다. 염치가 드는지 몸이 자꾸 옹그라든다.

작고 낮은 것, 몹시 무르거나 귀한 것을 보는 자세는 비슷한 듯하다. 살살 달래듯 펄조개를 캐낼 때도, 큰딸이 하굣길에서 넋을 뺏긴 채 콩벌레를 구경할 때도, 성냥개비만 한 아기 손가락을 만져볼 때도 그렇다. 작은 것을 보려면 내가 작아져야 하기라도 한다는 듯, 몸덩이를 도톰한 볼록렌즈처럼 오므리고 낮추게 된다. 나 자신이 돋보기가 되어 그 말간 것을 응시하다 실수로 불이 붙을 것도 아닌데 마음이 조심스럽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작은 봄들은 우렁차다. 손톱만 한 땅에 핀 민들레 새싹도 그 땅에선 자기가 제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다. 강낭콩만 한 태아의 심장박동이 얼마나 힘차고 경쾌한지 들어본 사람이라면 쉬이 이해하리라.

하찮은 생은 없다. 살아 움직이는 것은 매 순간 클라이맥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