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봄, 색(色)을 쓰다 / 김영식

cabin1212 2020. 3. 20. 06:42

봄, ()을 쓰다 / 김영식


 

 

벌컥! 벌컥! 궁중의 사랑채, 샛문을 열어젖히는 저 알몸의 교태를 보라지. 속 고쟁이 하나 걸치지 않은 아찔한 꽃들의 난장을 보라지. 집 뒤 야산 봄기운 물씬한 오솔길, 이제 막 피어난 개나리, 진달래가 느긋이 춘사春思를 즐기는 옷자락을 당기며 다투어 유혹을 한다.

점잖은 체면에 예키! 하고 애써 눈길을 피해 보지만, 줄기차게 따라오며 수작을 거는, 천방지축의 구애를 나는 문전박대하지 못하는데, 어쩌란 말이냐! 이 벌건 대낮에 은밀한 살 냄새 풀풀 풍기며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이 질펀한 음화淫花들을, 나 혼자서는 어떻게 다 수습할 수도 없는 이 봄의 분탕질을, 지천명의 나이에 꽃향기로도 어질한데, 이렇게 중구난방 대책 없이 덤벼드는 막무가내들이라니.

연지곤지 바르고 낭창낭창 휘어지는 버들 같은 허리며, 애간장을 녹이는 눈웃음이며, 나는 이제 꽃에게 포위되어 불빛에 갇힌 고라니처럼 그 자리 우뚝 서서 나를 맡겨버리고 마는데, 어느 시인의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자의 외간 남자라도 되어 저 눈부신 몸짓 위에 벌렁 팔베개를 하고 누워볼까? 이 짧은 봄날을 하릴없이 탕진해 볼까?

나는 어느새 춘향을 희롱하는 몽룡이 되어 꽃을 희롱한다. 조금은 거만하게 뒷짐을 지고, 배는 약간 내밀고 손바닥을 부채처럼 펴고, 팔자걸음으로, 헛헛 헛기침을 삼키며, 사방에 지천인 분 냄새를 맡으며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리 오너라. 앞태를 보자. 아장아장 걸어라, 걷는 태를 보자. 방긋 웃어라. 잇속을 보자. 아매도 내 사랑아.’

춘향가 한 대목이 산기슭 가득 울려 퍼지고 머리 위에선 그네 타는 처자의 치맛자락 같은 구름이 흘러가고, 저것 봐! 전나全裸의 몸으로 훌쩍훌쩍 꽃나무 위에서 뛰어내리는 꽃들의 낭자한 가슴을, 꽃의 무희들을. 꽃들이 나를 보쌈해서 제 침실로 데려간다.

종아리에 뚝뚝! 푸른 물이 드는 그 황홀의 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질어질하여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꽃의 포로가 되어 완벽하게 실종된 사람, 봄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람, 아내와 아이들이 나를 찾아 나서겠지만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고 아무 곳에도 없는 사람, 지상에서 영원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사람, 그리하여

개나리 저 순정의 방에서 하룻밤을, 진달래 저 열정의 방에서 하룻밤을, 목련 저 순수의 방에서 또 하룻밤을, 몽롱한 향기를 붙잡고 나는 나를 잊어버리고, 몇 주일의 스케줄도 잊어버리고, 급한 원고 청탁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 모두 다 잊어버리고 꽃과 합일하는 시간, 내가 꽃이 되고 꽃이 내가 되는 시간, 여기저기 色色의 교성이 터지고, 마침내 뭉턱뭉턱 꽃의 자식들을 퍼질러 낳는 시간, 그러다보면, 어느새 이 환장할 봄날도 다 지나가겠지. 연분홍치마를 봄날에 흩날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