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귀지 파는 법 / 권현옥

cabin1212 2020. 3. 30. 06:23

귀지 파는 법 / 권현옥

 

 

 

실 핀보다 조금 큰 귀이개를 잘 모셔둔다. 일요일 낮, 배가 부르고 슬슬 잠이 올 때 귀를 파달라고 하기 위해서다. 손길에 따라선 고통을 줄 수도 있지만 잘만 하면 행복하다’ ‘시원하다는 말을 감탄사처럼 내뱉게 하는 도구다.

우리 집에서 다른 사람의 귀지를 파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손이 큰 사람, 두 사람뿐인데 성격 탓인지 서로 방법이 다르다. 그는 어찌나 귓속을 부드럽고도 시원하게 후비는지 내 얼굴과 팔다리에 붙어있던 힘을 귀 밖으로 술술 풀려나게 한다.

나에게도 가끔 딸아이가 귀지를 파달라고 할 때가 있다. 나는 준비를 한다. 밝은 쪽으로 누우라 하고, 베개로 높이를 조절하고, 나에게 잘 보이도록 딸아이의 고개를 돌려놓고, 머리카락은 뒤로 잘 넘기기고, 귓불을 있는 대로 잡아 늘인다.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 놓고 확실하게 귓속을 들여다보며 귀지를 파내기 위함이다.

귀지가 보이면 그것을 파내기 위해 계속 공략하고 그러다 안 되면 더욱 깊이 들어가 긁어댄다. 딸아이가 어느 순간 , 아파하고 얼굴을 찡그리거나 소스라치게 짧은 비명을 지르면 나도 놀라 그만하자, 귀지가 별로 없어 재미없다하고는 밀쳐내 버린다. 그러면 거기서 끝이 나거나 그래도 더 해줘하면서 딸아이가 고통 반 시원함 반을 견뎌내기로 하면 그제야 내 욕심을 버리고 조심스러워진다.

어느 날, 그에게 또 귀를 부탁한다며 누워 간질간질한 행복감에 스르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이만하면 한쪽 귀가 실컷 호강했다 싶어 햇살이 비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방향을 바꿔 누우니 상관없다고 한다.

어두워서 안 보이잖아.”

사실은 안 보고 그냥 하는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아프지도 않고 시원하게 하는데?”

당신 얼굴 표정만 보고 해. 찡그리는 것 같으면 얼른 그만하고 가만있으면 계속하고.”

그는 귀지를 파려고 한 게 아니고 시원하게 해주려 했던 것이다. 나는 귀지를 깔끔이 없애 버리고 싶었던 것이 목적이었고 그는 처음부터 귀지를 긁어내겠다는 생각이 없었기에 귓속을 보지도 않고 살살 긁어댔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그에게 귀를 맡길 때마다 참 좋은 지혜로다하고 누워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상대를 위한 것이라면 내게 보이는 귀지보다는 상대방의 행복감에 주시할 일이다. 내게 보이는 귀지를 파려고 상대방을 아프게, 놀라게 하지 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