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상실 수업 / 권현옥

cabin1212 2020. 4. 7. 06:29

상실 수업 / 권현옥


 

 

잘있어?”

.”

잘 있냐는 말은 잘 있지 않을 거란 추측과 많이 달라도 한통속에 속하는 고통이었다. 선택할 단어가 없었을 뿐이었다. 신음 대신 간신히 뱉은 말이었다.

이쪽에서는 혼자 있을 저쪽이 걱정돼 전화를 한 것이었고, 저쪽에서는 혼자 있는 외로움을 전화벨에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움이 가슴을 뜯고 있을 때여서 말 같잖은 단어 몇 개가 전화기 속에서 만나려고 더듬거렸을 뿐이다. 어쩌면 비껴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무슨 말이 선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말이란 것을 밀어낼 힘이 없었다.

이쪽은 남편과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함께 웃고, 티격태격하다 잠시 외로워지면 문득 그녀가 생각났다. 그럴 때면 사치스러운 웃음 끝이나 투정 끝을 잘라내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저쪽은 전화벨이 싫었다. 할 말은 많았을 테지만 쏟아낼 말들이 무질서하고 탁해서 누구와도 말 섞기가 싫었다. 살아있다고 알리기 위해, 빨리 전화를 끊기 위해 만했다. ‘은 긍정이 아니고 부정이었다.

컴컴한 집에 들어가 불을 켜면 침묵이 처참했다. TV를 켜면 세상 밖의 시끄러움이 오히려 자신을 외톨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아 밤거리를 해매고 있다는 말을 어찌 하겠는가. 혼자 있는 게 무서워 찜질방에 누워 벽을 보고 울다 잠이 든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사회친구와 직장 동료는 그렇다 치고 부모님과 자식들에게까지 부끄러워지는 자괴감에 다리를 베란다 밖으로 걸쳐봤다는 말을 어찌 하겠는가. 냉장고가 비어가듯 가슴이 텅 비어가는 허전함에 무릎으로 설 수가 없어 주저앉아 있다고 어찌 매일 말하겠는가. 위로나 염려의 말들을 고마워해야 하는데 너에게 그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구나하는 조롱의 말처럼 들렸다는 속 좁은 심사를 어찌 말하겠는가. 가끔 웃을 일이 있어 웃으면 남편을 잃고도 저리 웃을 수 있구나하는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는 굴욕을 어찌 말하겠는가. 우울한 얼굴을 한 불편한 사람, 취급주의 인간인 듯한 껄끄러운 촉감이 느껴지면 울컥 슬퍼지는 열등감을 어찌 말하겠는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혼자 있고 싶은데 직장은 여전하고 집안행사나 명절도 여전하고 때마다 느껴지는 관심도 불편하고 무관심도 섭섭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맘도 다스리기가 힘든데 나 좀 이해해 달라고 어찌 말하겠는가. 한없이 나는 초라한데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투정이 모두 잘난 척으로 보인다고 누구에게 말하겠는가. 그렇게 상실의 끈으로 친친 몸을 묶고 숨 막혀 죽어가고 있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잘 있지?”

, 그래, 자전거 타다 쉬고 있어. 그래 잘 있지 너도?”

자전거 좋더라. 나도 한강에 자주 나갔었는데.”

자전거는 누구랑 말 한 해도 되고 청승맞아 보이지 않아서 타기 시작했어. 걷는 것도 매일 혼자 하니 처량해질 때가 있어. 자전거는 그럴 시간 없이 달려서 좋아.”

그네에겐 속도가 필요했다. 여울목처럼 재빠르게 흘러가고, 떠내려가고 부딪치는, 속도가 필요했다. 한발 한발 다 짚으며 걷기에는 고통이 적나라했다. 함부로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속도가 있고, 여러 번 눈길 마주치며 많은 곳을 바라볼 수 있고, 멀리 간 후 떠나온 곳이 그리워지는 것은 자전거로 가는 길이었다. 끊임없이 발을 움직이고 속도를 내는 길, 그래서 돌아오면 바퀴를 돌린 맘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가 상실 3년 만에 나와 여행을 했다. 혼자 버텨내야 했던 그녀와 어쩔 수 없이 잘 슬퍼하도록 바랄 뿐이었던 내가 함께 떠난 12. 호수를 바라보는 산 밑의 조용한 펜션에 도착하자 비가 주룩주룩 오기 시작했다.

으이구, 남편도 비 좋아했는데좋다.”

그녀는 쏜살같이 정자로 뛰어가 앉았다. 마루 끝에서는 빗방울이 톡톡 튕겼다.

날궂이 잘한다. 그래도 오늘, 혼자가 아니라 좋다. 혼자 다니는 거 이력이 났는데진력도 났고

가져간 고기를 구웠다. 고기 익는 냄새가 빗줄기에 젖어 가라앉았다. 혼자서 할 수 없었던 이 간단한 행위, 이런 것들이 한두 가지였던가.

회식이야 있지만 이렇게 나와서는 혼자 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있어, 니가 있어 좋다.”

그녀는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착하긴 무지 착했지. 나를 많이도 좋아했고. 내가 왜 그렇게 갑자기 먼저 떠냤냐고 차마 뭇지 못한 것처럼 그 사람도 왜 먼저 갔다고 말 못하는 것 같더라, 잘 있을 거야.”

그녀가 이제야 을 하고 있었다. 정자는 들이친 빗물로 시끄러웠지만 가운데는 조용했다. 과거가 가운데로 오순도순 모여 포옹을 나누는 듯했다.

견뎌온 시간을 말하는 그녀는 이제 상실의 끝자락에서 힘을 빼고 있었다. 상실만 붙잡느라 날마다 낡아갔던 스스로의 맘을 추스르고 있었다. 벼락처럼 온 이별의 놀람과 슬픔이 고통으로 있다가 이제 말로써 나오기 시작했고 상실의 늪인 과거에서 나와 미래로 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작게 말하며 나는 빗발친 빗물을 닦았다.

말해진 것들도 다 오지 않는 게 타인의 고통인데 말해지지 않은 고통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조금은 알 것 같다 해도 위로할 말이 궁해 잘 있지?”라고만 했던 세월, 견뎌온 시간이 온전히 그녀의 시간이었으므로 지금도 할 말이 없음은 마찬가지다. “견뎌줘서 고마워라며 고기를 뒤집었다.

상실 수업은 혼자 견뎌내야 하는 긴 자습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