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봄의 序曲 /김애자

cabin1212 2020. 4. 16. 06:34

봄의 序曲 /김애자

 

 

 

입춘(立春)24절기 중 첫자리에 들어있다. 그러나 명색만 거창할 뿐 봄은 아직 멀다. 보통 24일경에 겨울을 밀치고 들어서지만 응달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기습적으로 한파가 몰아닥치기도 하고 함박눈이 종일 퍼붓기도 한다. 올해도 늦추위가 끈질기게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통에 입춘은 어정잡이로 폼만 잡고 미적거리다가 3월에게 바턴을 넘기고 말았다. 때문에 2월의 음표는 라르고에 속한다. 급하게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므로 서서히 바람이 순해지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월로 들어서면 봄볕은 안단테로 조금 빨라진다. 온기를 품은 햇살이 겨우내 얼음을 뒤집어쓰고 있던 호수로 달려가 얼음을 깨뜨린다. 새벽마다 마을 어귀에서 얼음이 갈라터지는 소리가 골 안을 흔든다. 그러면 용케도 휘파람새가 찾아와 운다. 박명의 적막 속에서 휘파람새가 작은 부리를 열어 애처롭게 울고, 멀리서 빙판이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 나의 폐에선 어김없이 바튼 기침을 쏟아낸다. 이불자락을 귀밑까지 끌어 올리고 모로 누워도 소용없다. 이럴 땐 가슴도 시리고 어깨는 더욱 시리다.

호수의 수면에 깔린 얼음은 가장자리로부터 녹아들어간다. 얼음이 쩌렁쩌렁 울면서 갈라지던 틈새로 물이 고여 들고 부드러운 바람이 들락날락 스쳐갈 적마다 커다란 얼음덩어리들이 도미노현상을 일으킨다. 무더기로 무너지는 얼음덩어리를 보고 있으면 생각이 깊어진다. 얼음과 물은 둘이 아니건만 물이 얼음으로 몸을 바꾸었다가 다시 물로 돌아갈 때는 매번 울음으로 제 몸을 부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얼어붙었던 수면이 물살을 일으키며 살아나면 산은 재빠르게 제 그림자를 호수에 내린다. 물살을 타고 어른어른 흔들리는 산 그리매 사이로 흰 구름이 한가롭고, 물가 억새밭에선 참새들이 말똥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는 계집아이들처럼 귀가 따갑도록 재잘거린다.

3월이 중순으로 접어들면 이번엔 모데라토로 음표가 바뀐다. 잔풀나기 시절이다. 얼었던 지표가 녹으면서 푸석해졌던 흙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생명들이 다투어 밖으로 나올 채비를 서두른다. 겨울동안 죽은 듯 흙에 납작 엎드려 있던 꽃다지들은 어느새 엽록소를 띄고 일제히 꽃망울을 터트린다. 어김없이 찾아와 괴롭히는 꽃샘추위에 여린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꽃을 피운다.

꽃다지들은 봄의 귀염둥이다. 키도 작지만 꽃도 좁쌀 알갱이만큼이나 작다. 때문에 한 두 포기가 따로 떨어져 피면 피나마나 하다. 개체로선 존재감이 없다. 군락을 이루어야만 꽃으로 생명을 얻는다. 꽃빛깔도 연두 빛이 살짝 섞여 연노란 빛을 띤다. 게다가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피어오르면 연노란 빛깔은 아지랑이와 함께 아른아른 흔들린다. 이 몽환적인 빛깔을 한참 동안 바라다보고 있으면 속이 울렁거린다. 꽃다지가 일으키는 봄의 멀미다. 아련한 빛의 파동이다.

3월이 4월에게 바턴을 넘기면 이번엔 알레그로 비바체로 속도를 높인다. 온 산하에 살아있는 생명들은 저마다 파장을 일으킨다. 후원에 청매가 피어 알큰하게 향기를 풍기고, 개나리는 노란 종을 흔들어 음()을 만들고 마디를 키운다.

벚꽃은 헤프다. 꽃숭어리가 다붙어 구름처럼 일어나면 눈이 부시다. 천지가 꽃으로 두발을 한 듯싶다. 그러나 대엿새만 지나면 꽃잎은 낱낱이 흩어져 내린다. 1365일 중 고작 대엿새 피었다가 속절없이 비산하는 꽃나무 아래 서서 꽃비를 맞고 있으면 멀리서 코넷독주로 흐느끼듯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가 들려오고 두보의 시가 뒤를 잇는다.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줄어들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렇다. 맨 정신으로 지는 꽃을 보는 것도 슬프거니와 가는 봄을 보내는 것은 더욱 슬프다. 그런데 봄내 산 밑에 들어앉은 우리 집 뜰에는 온종일 꽃잎이 날아든다. 꽃에서 태어난 이 맑고 고운 슬픔을 나는 어찌할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