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안족(雁足) / 허모영
안족(雁足) / 허모영
농부의 발걸음이 잦아든 들판은 점점 고요 속에 잠겨들고 허공을 가르는 새들의 날개 짓이 빈 공간의 여백을 채우고 있다. 서로 앞지르지 않고 비껴선 질서로 비행을 마친 기러기들은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지상에 내려앉는다. 한쪽발로 꼿꼿이 우주를 지탱하듯 서있는 기러기의 모습이 갈색 현악기에 놓여있다.
안족(雁足), 현을 지탱하는 기러기발이다. 가야금, 거문고, 아쟁 등의 악기에는 현이 있다. 돌배나무나 산벚나무 등으로 기러기모양의 발을 깎아 현을 세워 올린다. 오동나무 판위에 나란히 서서 현을 받치고 있는 안족의 모습은 빈 들판에 한쪽 다리 곧추세우고 서있는 학처럼 고고하다. 악기의 소리는 현(絃)으로 나지만 안족이 없으면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다. 우주를 떠받들 듯 현을 받치고 있는 안족의 도움이 있어야만 비로소 현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빈 백사장의 여백을 채우는 새의 발자국처럼 공명판위에 안족을 올렸다. 현의 굵기에 맞춰 정수리에 홈을 파고 저음부터 고음까지 명주실을 올려 음의 높낮이를 조절해 준다. 안족이 제자리를 잡아주지 못하고 비틀거리면 음은 흔들려 제소리를 못 낸다. 현과 안족이 딱 맞게 서로를 지탱할 때 정확한 소리가 만들어진다. 홈이 닳아서 헐렁해지지 않도록 조율을 할 땐 조심스레 현을 들어 올려서 안족을 움직인다. 때론 움직이지 않도록 억지로 아교를 발라 놓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늘어진 음을 조율할 수 없어 음을 망치게 된다. 힘든 몸부림을 참고 인내하며 꼿꼿이 서서 다른 것이 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안족은 진정한 삶의 조력자이다.
혼례청에 들어서는 신랑은 처음으로 전안례를 올린다. 보자기로 목기러기를 싸서 상에 올리고 절을 하며 아내를 맞이하는 의식이다. 30년을 산다는 기러기는 장수의 새이기도 하지만 부부의 금슬이 좋은 새이다. 부부 중 먼저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한 마리는 죽는 날까지 자식을 키우며 혼자 산다고 한다. 현과 안족이 서로 도와 청아한 소리를 내듯 부부도 함께 서로를 받쳐주고 괴임을 받으며 자신의 본분을 다할 수 있다. 오래도록 사랑하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라는 의미로 혼례 의식에 기러기를 올리는 게 우리 결혼 풍습이다.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에 1990년대 들어 해외 유학바람이 불었다. 자식들에게 좀 더 많은 견문을 익히게 하여 잘살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자식이 유학길에 오르면 낯설고 물선 곳에 아이들만 보낼 수 없어 엄마들이 따라가 치다꺼리를 한다. 부부가 떨어져 지내는데 한국에 남아 열심히 직장 다니며 자식들 유학비를 보내는 아버지를 기러기아빠라 부른다. 가족이 모두 떠나버린 텅 빈 집에 혼자 남아 꼿꼿이 제자리를 지키며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야금의 안족과 다를 바 없다. 아이들을 따라가 뒷바라지하는 엄마는 기러기엄마라고 한다. 남편과 떨어져 자식을 키우는 모습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자식을 만나기 위해 아빠는 기러기처럼 허공을 날아 먼 길을 찾아간다. 대지를 밟고 서 있는 기러기는 가냘프거나 외롭지 않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기보다 누군가의 힘이 되어주며 삶을 버티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누군가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칠순을 바라보는 큰언니의 오랜 친구 한분이 있다. 이십대 초반부터 버려진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았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있던 그녀는 항상 긍정적이고 착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주변에서 그럴싸한 자리에 중매를 해도 거절하더니 누군가로부터 장애인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다. 경주에서 장사하며 두 아들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훌륭한 음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통을 인내하며 꼿꼿이 서 있는 안족이 그녀라는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겉치레보다 불편을 감수하며 더 불편한 사람의 버팀목이 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 현이 누르는 압력에 조금씩 닳아가는 안족처럼 그녀는 삶의 압력을 희생이라 생각지 않고 보람이며 감사함으로 생각했다.
최근 지인으로부터 가야금연주를 부탁받고 조율을 하였다. 음 높이에 따라 조심스레 안족을 배열하는 동안 손끝에 와 닿는 느낌이 새로웠다. 자신을 희생하며 음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생각하니 조그만 그것이 새삼 중요해진다. 현을 받쳐주는 기둥이 있기에 가야금 열두 줄은 각각의 소리를 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감싸 안으며 연주자와 음악은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 숨 쉰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안족과 같은 역할을 한 적이 있는가? 가야금판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내며 문득 사소함 속에 담긴 깊은 삶의 진리를 발견한다. 형상은 작지만 큰 의미로 실천하는 삶이기를 가야금 선율에 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