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비로소 할머니가 되었다 / 이영옥
비로소 할머니가 되었다 / 이영옥
어, 어, 뭐야?
쿵!
순식간에 일어난 교통사고다.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성남, 북안양쪽으로 나가던 중 앞에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며 쿵! 소리를 냈다. 뒤따라 달리던 나는 눈으로 보면서도 앞차를 들이 박았다. 주관적으로는 불가항력, 객관적으로는 안전거리 미확보. 첫 손주 백일에 축하차 성남으로 가던 길에 일어난 난감한 상황이다.
지난 2월 딸에는 엄마가 되었다. 소식을 전하는 사위의 음성에서 기쁨과 떨림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날따라 출산이 많아 입원실이 가득 찼다고 했다. 몇 년 만에 찾아오는 길일이라 그런다는 것이다. 말로만 듣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좋다는 날에 손주가 태어난 것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여느 친정엄마처럼 당장 달려가려 했지만 당일은 아기아빠 이외는 면회 사절이었다.
뒷날 한 시간을 달려 병원에 갔다. 마침 신생아인 손주가 병실에 와 있었다. 내 눈에는 아이보다 퉁퉁 부은 딸애가 먼저 보였다. 대견함과 안쓰러움에 콧날이 시큰거렸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슴이 짠한데 딸애는 의연했다. 태명을 부르며 ‘외할머니 오셨다’ 하는데 아직은 할머니보다는 엄마이고 싶었다.
강보에 싸인 손주는 까만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웃는 듯 하다가 다시 찡그리더니 울었다. 우는 아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엄두가 나지 않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곁에 있던 사위가 가만히 안았다. 외할머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내 눈에는 아이가 너무 작고 여려 안기라고 하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끝내 안아보지 못하고 병실 문을 닫았다.
돌아오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손주를 예뻐할 수 있을까. 두 딸을 키워주신 어머니처럼 손주를 사랑할 수 있을까. 딸들이게 지극 정성이던 어머니를 생각하니 자신이 없었다.
딸애는 병원에서 산후 조리원으로 옮겼다. 산모가 몸조리를 할 수 있도록 외부인 출입을 제한했다. 딸애는 면회가 안 되는 것을 미안해했지만 나는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아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많이 보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다시 열흘이 지나고 딸네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휴무를 기다려 밑반찬 몇 가지와 간장에 조린 소고기를 준비했다. 손주가 많이 보고 싶고 사랑이 가득한 할머니처럼 성남으로 또 달려갔다.
손주와는 두 번째 대면이었다. 그새 아이는 달라져 있었다. 지난 번 보다 조금 야물어지고 단단해 보였다. 아직 태명을 부르는 손주를 안아보는 것이 내게는 쉽지 않은 과제처럼 느껴졌다. 손을 씻고 나자 딸애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살며시 안겨 주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잠시도 그대로 있지 않고 꼬물거렸다. 우리 딸들도 그랬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했고 우리에게 와준 것이 감사했다.
딸네 부부는 손주에게 분유를 먹이기 위해 애를 썼다. 아이가 칭얼댈 때마다 사위와 딸애는 기저귀도 노련하게 잘 갈아 주었다. 유튜브로 배웠다니 친정엄마의 존재감은 떨어져도 기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미역국을 한 냄비 끓여주고 가지고 간 밑반찬을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손님처럼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딸애는 걱정과 달리 육아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고 신통했다. 딸애는 매일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냈다. 천정엄마로서 늘 자신 없는 내게 모처럼 자신 있는 일이 한 가지 생겼다. 사진이 날아 올 때마다 칭찬과 덕담을 하며 답글을 달아주는 일이다. 이것만이라도 잘하면 딸애한데 응원이 되겠지 생각하고 마음을 다해 최고의 손주를 만들었다.
24시간 아이와 함께 하는 딸애는 행복해 보이고 가끔은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러다가 가른 친정엄마들처럼 육아를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귀하고 예쁜 줄 모르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날마다 전송되어 온 사진과 동영상에 내가 조금씩 달라지는지 애틋한 마음이 일었다. 그렇다고 J선배처럼 손자를 봤을 때 삶을 완결 지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덤덤하면서고 무언가 부족한 엄마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주변의 지인이 손자를 처음 안았을 때 느낌을 물으면 “실감이 안나 잘 모르겠어요.” 하고 대충 넘겼다. 시원찮은 대답에 멀리 있어 그런 것 같다는 말을 하면 적잖아 위안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손주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 내 눈에는 딸애가 먼저였다.
교통사고는 순조롭게 수습되고 다행히 다친 곳도 없었다. 나는 먼 허공을 향해 ‘아! 감사합니다.’ 혼잣말을 했다. 내가 다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날은 첫 손주의 백일. 순간 그동안 나에게 붙어 있던 찜찜함이 떨어져 나간 듯 개운해졌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미신이라도 해도 좋았다. 손주의, 딸애의 액땜을 내가 해줬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길일이라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출산하던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사고 처리를 하면서 예전처럼 덜덜 떨지도 않았다. 의연하게 시고를 접수하고 차량도 렌트해서 성남으로 달렸다. 나는 비로소 할머니가 되었음을 확실하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