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장미가 있는 저녁 / 서미애
장미가 있는 저녁 / 서미애
어스름 그림자를 밟으며 수림대 장미 정원에 왔다. 장미 축제에 앞서 미리 장미 구경에 나선 것이다. 화관을 쓴 장미의 여신이 먼저 반긴다. 비너스상 버금가는 예쁜 자태의 조형물이다. 체온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반지 모양의 ‘사랑의 온도’ 조형물과 터널, 하트, 바이올린, 어린 왕자 조형물까지 반짝이 전구와 조명으로 치장을 한 채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둠이 짙어지자 조명은 더 화려해지고 정원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환호성을 지른다. 정원을 한 바퀴 휘 들러본 나는 정원 가운데쯤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수십 종의 장미가 한눈에 들어온다. 혼자 우뚝 서 함박꽃처럼 탐스런 모습을 뽐내는 장미가 있는가 하면 능소화처럼 줄기를 타고 올라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미도 있다. 모양뿐 아니라 색깔도 가지가지다. 차오르는 열정을 주체할 수 없는 듯한 붉은 장미와 다소곳한 새색시처럼 은은히 빛나는 분홍 장미, 하얀 레이스를 팔락이는 흰 장미와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노란 장미, 분홍과 주홍이 섞여 오묘한 빛을 내는 장미도 있다.
수만 송이의 장미와 함께 어우러져 있으니, 마치 내가 장미가 된 듯하다. 나이 들수록 두꺼워지는 것은 얼굴밖에 없는지 근거 없는 자존감만 높아지고 있다. 작은 키와 수영선수처럼 떨 벌어진 어깨, 다리가 불편해서 뒤뚱거리는 걸음까지 어딜 봐서 내가 장미를 닮았을까. 하지만 꽃이나 사람이나 저마다의 개성이 따로 있지 않을까. 모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장미가 있는가 하면 키 작은 민들레나 제비꽃, 채송화도 자기만의 매력이 충분하지 않는가. 이른 봄에 피어나 일찍 생을 마감하는 벚꽃이나 목련도 자기만의 향기를 깊이 새기고 떠난다. 누가 벚꽃이 목련보다 작다고 멸시하는가. 화르르 꽃비를 내리는 벚꽃은 작아서 더 황홀하고, 학처럼 고고한 빛을 발하는 목련은 우아한 멋이 일품이지 않은가.
코끝에 와 머무는 장미향처럼 사람도 자기만의 향기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미소만큼은 장미도 따를 수 없는 나만의 향기라고 애써 자부해본다. ‘다리가 불편한 내가 똑바로 걸으면 나의 참모습이 아니지’라는 마음도 굳게 가져본다. 외모로 인해 주눅 든 일이 허다했지만,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인정하려 애쓴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쿵! 쿵! 음악이 들려온다. 정원 옆 작은 무대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하와이 전통 복장을 한 여인들이 훌라춤을 추고 큰 꽃무늬 옷을 입은 여인들이 동남아 국가의 전통춤을 춘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문화 가정의 여인들인 듯하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의 스포츠 댄스와 색소폰 연주가 이어지며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는다. 국가와 나이를 초월한 공연자들이 자기만의 향기를 마음껏 발산하는 것이다.
정원엔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하트형 아치 앞에 앉았기에 그 배경으로 사진 찍는 모습을 자연스레 관찰하게 된다. 엄마와 딸이 사진을 찍는다. 번갈아 가며 독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서로 한 손을 뻗어 하트모양을 그리며 셀카를 찍기도 한다. 밝은 표정에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을 보니 평소 소통이 잘 되는 모녀인 것 같다.
“야야! 여기 너무 예쁘다 사진 한 장 찍고 가자.” 어느새 한 무리의 여인이 다가온다. 나이가 들며 용감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닌가보다. “엄마, 아빠 여기서 사진 한 장 찍어요.”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앞서가는 노부부를 불러 세운다. 그 소리에 키 큰 할아버지가 앞에 어깨를 떡 벌리고 서고, 그 뒤쪽에 몸이 반쯤 가려진 채로 키 작은 할머니가 엉거주춤 섰다. 나는 ‘엄마, 앞쪽으로 나와서 아버지 옆에 나란히 서세요.’라며 어머니의 위치를 바로잡아줄 것이라는 짐작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자, 하나 둘 셋”하며 어느새 셔터를 누르고 만다.
왜 어머니의 위치를 바꿔 주지 않지? 의아한 생각을 하는 사이 그들은 벌써 내 눈길에서 벗어난다. 그냥 지나가는 행동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할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평생 기 한번 펴지 못한 할머니의 평소 모습인 것 같아 자꾸 마음이 쓰인다. 딸의 눈에도 예사로이 비친 것은 그 삶의 반증이 아닐까. 몸이 불편한 탓에 늘 숨기만 했던 내 어린 날이 스쳐서일까. 방금 마주한 광경이 쉬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평생 가족을 위해 묵묵히 살아온 우리들의 어머니, 그 모습이 바로 다소곳한 할미꽃의 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이어 든다. 그 수더분한 향기를 미처 보지 못한 것 같은 내 지나친 상상을 서둘러 접는다.
수만 송이의 장미와 사람들이 어우러진 정원에서 겹겹이 쌓인 꽃잎만큼이나 다양한 삶을 바라본다. 무심히 하는 행동에서 그 삶이 어렴풋이 엿보이기도 했다.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 삶의 이력이 아닌가. 제각각 향기를 지닌 사람들, 문득 나의 향기는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조금 전 할머니처럼 뒤에 숨거나 움츠리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내게는 어떤 향기가 있기나 했을까. 하지만, 뒤늦게 피운 문학의 향기. 특히 재능기부를 통해 후배들에게 전하고 있는 만학으로 피운 학문의 향기는 인생 후반을 대표하는 나의 향기가 아닐까. 내 뒤뚱거리는 걸음이 더는 부끄럽지 않은 것도 이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불빛에 더욱 자태를 뽐내는 장미와 함께 오월의 저녁이 깊어간다. 내일부터 장미로 인해 행복해질 수많은 사람의 향기를 그리며 서서히 장미정원을 나선다. 중량천도 향기에 취해 사흘간은 잠을 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