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들깨 밭에서 / 이채영

cabin1212 2020. 7. 21. 05:51

들깨 밭에서 / 이채영

 

 

 

팔 남매의 막내며느리여서 참 다행이었다. 있어도 없어도 크게 표시가 안 나는 자리, 나를 위해 비워둔 적격의 자리였다.

2년 전까지 슈퍼를 했다.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TV에서 나오는 귀성길 정체 화면은 우리 부부이겐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 슈퍼는 명절날에도 문을 열었다. 그래서인가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묻어나는 정을 피부로 느끼고 싶은 바람이 생기곤 했다. 요즘 들어서 며느리뿐 아니고 부모님도 걸리신다는 유행병 명절증후군. 나 역시도 예외 없는 며느리군의 일원이다. 하지만 슈퍼를 한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 늘 피해갈 수 있었다.

시집오기 전, 남편 따라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던 시골길은 서울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내겐 여행처럼 좋았었다. 농촌에 대한 거부감 없는 모습에서인지, 가족을 지극히 아끼던 돌아가신 나의 친정 아버지가 보살펴 주신 때문일까. 이해심이 바다보다 넓은 형님의 동서 사랑은 결혼 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갖은 양념에 김장김치까지 도맡아 해주셔서 그저 감사하게 서울살이 한 지 30여 년이다.

벌써 추석이 한발 앞으로 다가왔다. 문득 슈퍼를 접던 두해 전, 시댁에 가서 가을걷이를 도와줬던 날이 생각났다. 여태껏 주는 것만 받던 내가 드디어 형님께 빚을 갚을 날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맘속으로 혼자 물었었다. ‘얼마 만인가, 그동안 참 감사했지.’ 막내며느리라는 책임이 주어지지 않은 공짜 이름표 덕분에, 가게를 담보로 명절날은 못 오는 며느리로 인정받으며 편하게 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번에는 시골에 미리 내려가서 형님 내외분을 도와 드리기로 마음먹었었다.

그해는 추석이 늦은 탓에 농촌은 바심(가을걷이)을 하느라 한창 정신없이 바쁜 때였다. 젊은이들은 안 보이고, 60대 어른들이 젊은이라는 칭호를 듣는 시골은 지금도 늘 일손이 부족하다. 점심을 먹은 뒤 형님에게 일을 도와주려고 왔으니 할 일이 있으면 말씀하라고 했다. 형님은 들깨 바심을 해야 한다며 의심쩍은 눈빛과 미안한 마음이 담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집 뒤의 넓은 밭에는 베어놓은 들깨 더미들이 군데군데 모여 있었다. 아주버님의 콤바인 기계가 등장했고, 주변 바닥에 넓고 커다란 천으로 빙 둘러 진을 쳤다. 들깨 한 톨이라도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가르쳐 주는 대로 나르고, 잡아주고, 날리고, 담고. 어느새 장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 속 낯익은 시골 아낙이 되어, 들깨와의 뜨거운 한판 사투를 벌였다. 그러길 서너 시간, 손가락 끝에 물집이 잡힌 것 같은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허리는 뚝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다리는 퉁퉁 부어서 걷지도 못할 것처럼 뻣뻣해졌다.

시골의 기계화된 농기구들의 향연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면 오판이다. 알곡을 쪼아대는 새들의 공습을 막기 위해 들녘엔 신종 허수아비들이 뻔뻔한 얼굴로 위풍당당하게 앞장서 있었다. 들깨 한 톨을 모아서 한 되를 만들기까지 변덕스러운 바람을 앞세워야 했다. 전신을 특히, 눈 코 입을 공격하는 먼지와 검불 속에서 콤바인이 다스리지 못한 잔 줄기를 날렵한 손놀림으로 들깨 알만 살려내며 걷어낸다. 체로 거르고, 바람과 풍구로 날리고, 벌레를 처단하면서 1차 수확을 끝냈다.

한 걸음이라도 덜 걷고 싶은 마음에 뒤란을 가로 질러 집으로 들어왔다. 누구보다도 힘들었을 형님은 이내 요리사가 되어 저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허리가 아프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힌 것 같다고 투정을 하려다 꿀꺽 삼켰다. 손가락이 아려서 얼른 장갑을 벗어보니 분명 잡혀 있어야 할 물집은 안 보였다. 믿기지는 않았으나 다행이라 여겼다. 허리는 펼 수가 없어 그냥 드러눕고만 싶었다.

저녁밥상에서 형님은 자네가 도와줘 일이 많이 줄었다며 이번 가을엔 들기름을 더 많이 짜서 줘야겠다고 말했다. 난 속으로 얼른 받아쳤다. ‘아니에요. 형님. 전 들기름 안 먹고 안 할래요.’ 다음에 또 해달란 소리도 아니건만 어느덧 머릿속에서는 고개를 흔들며 이렇게 힘든데 그냥 사 먹고 말지란 말이 떠오른 것이다. 곡식 한 톨을 거두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형님은 친정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당신의 수고로움은 뒤로하고 건강이 최고라며 해마다 신토불이 먹거리를 보내줬던 것이다. 이렇듯 귀한 것들을 여태껏 어떤 마음자세로 받아왔었나 하고 새삼스레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중히 생각했으며 아껴 먹었었나! 항상 주셨으니 당연히 또 주는 것으로 알고 받아오지는 않았나! 언젠가 이 알곡들을 소홀히 하고 상하게 뒤서 버린 적도 있지 아니한가.

겨우 한나절 체험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꼈고 깊은 반성도 했다. 보내 주셨던 갖은 곡식들과 양념들, 특히 들기름은 입맛 없을 때 밥 비벼 먹으라며 병에 담아 비닐봉지에 꼬옥 싸서 넣어주셨다. 고소한 향기를 풍기며 음식에 어우러져 오래도록 감칠맛을 주는 들기름, 그것은 형님표 사랑의 땀방울이었다.

2년 전, 명절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느꼈었던 감정들이 지금도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몸은 비록 고단했었지만 마음은 행복했던 날이었다. 다시 한 번 들깨밭에서의 과정을 떠올렸다. 들에서 보았던 형님 내외분의 주름진 얼굴과 휘어진 등허리가 애잔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날, 올라오던 차 안에서 바라본 확 트인 산야(山野)는 넉넉함을 품에 안고 나에게 금빛 미소를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