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목련꽃 / 이 선
목련꽃 / 이 선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 박목월, <4월의 노래>
4월 그 날을 생각하면, 나는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1986년 봄, 나는 두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공사현장에서 사고로 인한 것이다. 나는 천안에 있는 회사 연수원 건설 막바지 공사로 책걸상 등 입고되는 비품 검수를 위해 현장에 나갔다. 연수원 개설준비 전산 담당으로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나 우리 부서 직원들이 순번을 정해 번갈아 일주일씩 파견 나간 것이다.
서울 본사에서 이곳 연수원 근무로 지원한 나는 사전답사를 겸한 현장 경험을 위해 나간 것이다. 당시 아내는 천원군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기에 내가 천안 연수원 근무를 자청한 것이다.
아직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말 아침, 몇몇 제품 검수가 끝나고 외곽 산책로 조성을 위한 준비를 한다기에, 그 현장을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울타리가 있는 부지 가장자리로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천안 태조산 정상 부근의 외곽 울타리를 돌다가 내려오는 길에 가파른 경사를 만났다. 길이 조금 미끄러워 콘크리트 울타리를 잡았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오른손으로 잡고 내려오는데 그 큰 콘크리트 울타리가 무너져 내렸다. 순간 내민 나의 왼손가락이 긴 울타리 대목에 치인 것이다. 순간 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끼고 있던 하얀 목장갑을 벗어보니 피가 많이 흘러내렸다. 부랴부랴 산 아래 연수원 건설현장으로 내려와 후배의 도움으로 천안 시내 정형외과로 이동하여 응급조치를 받았다.
사고가 있던 날 새벽에 아내가 전화를 해왔다. 공사현장이 산등성에 있어 날씨가 춥다고 했더니, 출근하면서 내 방한복을 가지고 택시를 타고 갑자기 온 것이다. 그때만 해도 공사현장에는 여성의 출입을 금기시하는 시절이었다. 꼭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우연의 일치일 것이지만, 건설현장에서는 그런 속설이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현장에 있었던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완공 후 현장에서 근무하던 여직원의 어머니도 한쪽 팔을 자르는 사고가 있었다. 숙실 경비 요원으로 있었는데, 세탁된 침대 시트를 아주 큰 전기다리미로 다리다가 손목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일어난 사고였다. 공사현장에서 인명사고가 자주 발생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수원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담당 의사는 집 근처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제안했다. 긴급하게 응급조치한 다음 수원 성빈센트병원으로 이동하여 입원하였다. 다음 날 전신마취를 한 상태에서 수술에 들어갔다. 부러진 왼쪽 새끼손가락은 넷째 손가락 마디 위 피부를 절개하여 손바닥에 붙이고, 그 넷째 손가락 위는 사타구니 살을 떼어 이식하였다. 넷째와 새끼손가락을 이어서 피부에 피가 통하도록 반듯하게 이어놓았다. 수술 날 밤 전신마취가 덜 깬 상태에서 담당 임원이 왔을 때, 나는 계속 헛소리를 하였다. 그렇게 넷째 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 한 달 후에는 왼쪽 어깨 국소마취로 두 손가락을 분리하는 수술을 했다.
입원한 성빈센트병원은 독일 원조로 지어진 건물로 내부 시설이 아주 튼튼했지만 약간 구식이었다. 한 달 동안은 왼손가락 들고 다니는 ‘나이롱 환자’로, 두 손가락 절개수술로 또 한 달은 상처치료와 구부리는 연습만 했다. 병실에서는 누군가 퇴원하면서 남기고 간 당시 유행하던 가수 ‘해바라기’의 음악 테이프를 듣거나, 바깥에 나가 책을 보거나 산책을 하며 지냈다. 아픈 손가락과 씨름하는 동안, 어느덧 병원 앞마당엔 봄꽃들이 곳곳에 군무를 이루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는 물론 잔디광장에 아름다운 하얀 목련이 많이 피어있었다.
병실에만 갇혀 지냈던 그해 봄은 내게 찬란하고도 슬픔이 흐르는 기억으로 자리해 있다. 그때 나의 유일한 위로는 목련꽃이었다. 이후 그렇게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을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위로이고 희망이었다. 동료들은 연수원 개원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모두 바빴지만 나 혼자서 병원에서 두 달간 요양을 했다. 짧은 안식년을 맞이한 셈이다. 어쩌면 그 휴식 덕분에 그 회사에서 25년 근무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38명의 입사 동기 중에 마지막으로 내가 그 직장을 떠났다.
몇 년 전 성빈센트병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많은 꽃과 나무가 있던 잔디광장은 모두 새 건물이 들어섰다. 내게 위로와 희망을 줬던 그때 화려한 목련의 군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봄이 되면 꽃들은 다시 피어나지만 우리 인간들은 어린 소년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花有重開日 人無更少年)는 중국 명구일구를 생각해 본다.
밤을 낮처럼 밝혀주던 그 꽃들이 지금도 어디에서 또 누군가에게 설렘과 희망을 주고 있으리라. 목련 꽃그늘 아래서 책을 읽던 그 시절이 그나마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요 돌아가고 싶은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