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네모에 갇히다 / 노혜숙

cabin1212 2020. 8. 27. 06:07

네모에 갇히다 / 노혜숙

 

 

 

 

나는 골몰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 끌리고, 빠지고, 갇힌다. 늘 거기 있으나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사물들, 어느 순간 그들 속에 갇힌 나를 본다.

눈을 뜨면 시선은 버릇처럼 천장에 가 머문다. 네 귀 반듯한 사각형의 안방 천장. 그만큼 내 삶의 민낯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존재도 없으리라.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고 그 둘이 네 명의 가족을 이루었다가 다시 한 사람이 된 역사를 지켜본 그가 아닌가. 그동안 두 아이는 제 둥지를 찾아 떠났고, 남편은 아내보다 텔레비전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중년이 되었다.

천장은 수많은 날 남모르는 나의 뒤척임과 한숨을 낱낱이 꿰고 이을 것이다. 저 케케묵은 과거로부터 끄집어낸 잡념을 미래로 확장해가는 부질없는 버릇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출정했다 패배한 병사처럼 지쳐 귀가하는 주인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으리. 가끔은 생의 불안을 신심 깊게 다독이기도 하지만 끝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한 마리 짐승처럼 웅크리고 잠든 모습도 보았겠지. 아니, 그 몸짓 속에 담긴 욕망의 갈피갈피까지 섬세하게 헤아리고 있을지 모른다.

때로는 나를 위로하고 싶었을까. 아니, 등짝을 후려치며 깨어 있으라, 일성을 내지르고 싶었을지도 몰라. 아주 가끔은 넌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엄지 척'을 해주지 않았을까. 그는 물끄러미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반듯한 모양새로 나를 억압하지 않고, 시시콜콜 나의 모자람을 저울에 달지 않으니 편안하다. 내 어설픈 관념이 조금이나마 숙성되어 삶의 진국으로 녹아들 수 있었던 것도 저 침묵의 관용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에게 사무치게 그립고 따스한 공간이기도 할 사각의 방. 눈이 흐려져서야 깨닫는다. 이 네모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편안한 거처라는 것을.

나는 스마트폰을 '스선생'이라 부른다. 그는 매끈한 네모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광속의 세계를 오가며 예측을 불허하는 카메라의 표정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는 사람들의 시간과 돈, 정신을 무저갱처럼 집어삼키며 증폭된 갈증을 재생산해 낸다. 가상의 만남과 가상의 위로 그리고 가상의 누각 속에서 진짜 관계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가상의 허망함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계속 가상의 세계에 머물며 수시로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그는 어쩌면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까지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 모른다.

나 역시 '스선생'의 애용자다. 그는 내 모든 인연의 끈을 쥐고 있다. 그가 없는 나는 미아에 가깝다. 무엇보다 그는 나의 내밀사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굳건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는 속성상 비밀보장이 불가능한 존재다. 내밀사항은 언제든 민들레 홀씨처럼 불특정한 곳에 착지해서 무성한 소문으로 발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높지 않다. '스선생'은 자기 안의 빅 데이터를 통해 흥밋거리의 상중하를 가려내는 귀재다. 이름 없는 아낙의 평범한 일상은 주의를 끌 만한 소재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릴 것이다. '스선생'은 적과의 동침처럼 위험하고 역동적인 네모, 그야말로 맘몬 신의 가공할 만한 창조물이다.

신이 죽었다고 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신이라는 말을 듣는 네모가 있다. 시대 따라 변모하긴 했지만 오늘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그의 형상은 단연 네모다. 그는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자체로는 무해하나 사용자에 따라 그 성격이 빛과 어둠으로 갈린다. 사람을 빛나게 하지만 안하무인의 지배자가 되기도 한다. 마실수록 목이 타는 바닷물처럼 가질수록 갈증을 불러일으키는 네모. 세상은 날마다 마법의 네모 때문에 울고 웃고 파도처럼 출렁인다. 어느새 인간사의 척도로 등극한 그의 이름은 '머니'.

나도 머니가 좋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그럼 달력의 빨간 날마다 여행을 떠날 것이다. 순례자처럼 산티아고를 걷고, 몽골 사막에 누워 푸른 별을 바라볼 것이다. 마추픽추 산정에서 스러져간 잉카인의 마지막 숨결을 느껴 보는 것도 좋으리. 저 뜨거운 사바나 초원을 야생마처럼 달려보고 싶어라. 물론 가까운 이들에게 기운 나는 밥도 대접하고 양심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 불우한 이웃들에게 온정도 베풀어야지. 머니가 주는 달콤하고 허망한 꿈이여. 나는 자주 머니가 지닌 각에 찔린다. 각을 품고 어찌 찔리지 않으리.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네모가 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네모들을 압도한다. 관이다. 그는 인간의 한 생을 집어삼키며 무화시킨다. 오욕칠정에 갇혔던 생이 네모난 화구 안에서 철저히 산화된다. 한 줌 재가 되어 영면하는 장소도 네모 안치대다. 지지고 볶고 사는 방도, 현대인의 우상이라 일컬어지는 '스선생', 이 시대의 유일신 '머니', 생의 마지막 귀착지까지 모두 네모 형상이라니!

거울 앞에 선다. 네모의 거울 속에 네모 형 얼굴의 내가 서 있다. 보이지 않던 내 안의 각이 보인다. 나를 가둔 게 바깥의 각들만은 아니었던 게다. 완고한 내 안 사각의 방. 세월 덕에 허물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네 각이 선명하다. 갇힌 줄도 모르고 갇혀 살았다.

산다는 건 나를 가두거나 가두려는 것들 사이의 부단한 싸움이던가. 자유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다. 인생은 고지만 Go이기도 한 것. 저 마지막 네모가 나를 가두는 그 순간까지 골몰하게 하는 것들과의 줄다리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안의 각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길도 모색해야지. 그래, 이러한 투쟁도 살아 있는 자의 특권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