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김소이 양 / 조귀순

cabin1212 2020. 9. 8. 05:59

김소이 양 / 조귀순

 

 

 

작은애 약국 앞에 놓인 화분들이 화려한 리본 띠를 둘렀다. 제각각 이름을 내걸고 마치 홍보사절단처럼 바람 따라 춤을 춘다. 예전에는 개업 축하 화분에 축 개업, 축 발전, 번영등 뜻이 함축된 단어가 쓰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라고 꼭 집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약은 어디서? 바로 여기 **약국!’ ‘아프면 **약국! 유 약사가 최고지!’ 지나가던 사람들도 글을 읽으며 싱긋 웃었다.

남편은 바람에 날려서 행운목에 휘감긴 리본을 폈다. 리본 글씨가 잘 보이도록 가지런하게 내려놓더니 이름 적힌 면을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김소이양이네. 혹시 작은애 여자 친구인가? 당신 알고 있었고?”

아뇨, 우리 아들들이 뭐 자분자분 말하는 애들인가요?”

혹시 여기 와 있는 아가씨 중 한 명이 아닐까?’ 똑같은 생각을 했던지 남편과 내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약국으로 들어갔다. 안이 비좁아 서 있기도 불편했지만 남편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나는 약국 내부를 둘러보며 아기씨들을 훔쳐보았다. 청바지, 원피스, 긴 생머리, 아담한 키, 그중 누구일까.

청바지는 인상이 맑다. 단정한 커트 머리와 동그름한 얼굴에 귀염성이 붙었다. 시원한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고향은 어디일까. 아주 멀지 않으면 좋겠다.

꽃무늬 원피스 아가씨는 늘씬하고 여성스러우나 너무 말랐다. 하지만 어깨가 반듯한 게 약골은 아닌 것 같다. 자기 몸매 관리를 잘한 건가. 오뚝한 코가 예쁜데 한편 고집이 있고 도도해 보인다. 마른 체격에 비해 얼굴은 뾰족하지 않고 통통한 게 부드럽다. 하관이 좋은면 돈복이 있다는데 은근 마음이 쏠렸다. 형제가 어떻게 될까? 설마 외동딸인가. 외동딸 결혼시켜 사위를 본 장모는 키울 때 느껴보지 못했던 아들의 듬직함에 푹 빠져버린다던데, 아들을 통째로 뺏기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다 긴 생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쌍꺼풀 없이 눈 꼬리가 위로 살짝 올라갔다. 무엇을 해도 야물닥스럽게 할 것 같은 인상이다. 살림에 욕심이 많아 너무 지들만 생각하고 부모는 아예 나 몰라라 하면 안 되는데. 아니야, 헤프게 퍼주는 것보다 지들 앞가림 잘하고 사는 게 낫겠지? 내 아들도 무른 편은 아니라서 둘이 붙으면 티격태격하려나. 아니면 오히려 손발이 척척 맞을까. 재바르게 일을 잘할 것 같다. 이왕이면 궁합도 잘 맞으면 금상첨화지 않겠어. 무슨 띠일까?

미시던 물컵을 들고 나오려는데 아담한 키의 아가씨가 우리 앞으로 커피잔을 들고 왔다. 키가 조금 작아 살짝 아쉽다 했는데 어른 공경할 줄 아는 사람이내. 점수를 후하게 주었다. 컵을 받친 손가락이 짧다. 예로부터 손가락이 길면 개으르다 했다. 뭉툭한 손을 보니 바지런할 것이다. 하얀 피부는 아니나 눈매가 서글서글하다. 왠지 외동딸은 아닌 것 같다. 12녀의 둘째딸이라면 좋겠다.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얼마 전, 어느 모임의 한 회원이 좋은 혼처가 있다면서 소개팅을 주선하자고 했다. 결혼만 한다면 5층 건물에 맨 위층은 살림집을 하고 2, 3, 4 새 개 층에는 병원을 임대하여 1층에 약국을 차려 주겠단다. 나는 마음이 혹하여 아들에게 만나나 보라고 권했다. 생활비를 도와줘야 하는 집보다 이왕이면 재력 있는 집이 낫다면서 부추겼다. 한두 살 많으면 어떠냐고. 내 뜻은 단칼에 잘렸다. 인성에 재력도 있다면 더 좋다는 뜻인데, 엄마가 그렇게 속물근성이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며 경멸의 눈빛을 보였다. 속물로 찍혔으나 첫째가 인성이고 이왕이면 다홍치마이길 바라는 건 나만 그럴까.

마시던 커피를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남편에게 어느 아가씨가 눈에 띄더냐고 물었더니 모두 다 예쁘고 고운데 그래도 역시 긴 생머리가 먼저 보였단다. “아니, 누가 자기 젊었을 적 취향을 물었나.” 남편은 내 말을 귓전으로도 안 듣고 갑자기 작은애를 불렀다. 눈짓으로 행운목을 가리키며 네 여자 친구가 김소이 양이냐 물었다. 아들은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왔으면 인사 좀 시켜주라고, 이럴 때 얼김에 소개하는 것도 좋다고 남편이 재촉했다. 나는 어떤 옷을 입었는지만 알려 달라 보챘다. 서른 살이 넘도록 한 번도 아들의 여자 친구를 본 적이 없다. 큰아들도 결혼하겠다고 처음으로 데리고 온 아가씨가 지금의 며늘애이니 우리 부부에게는 경이로운 일이다.

작은애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할 수 없다는 듯 약국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 거기 김소이 양! 이리 나와 봐. 부모님께서 궁금하시단다. 인사드려.”

갑자기 말소리가 끊겼다. 풉풉 웃음소리가 났다. 여자 친구가 수줍다 했는지 청년들이 앞장서서 주르르 나왔다.

저 아버님 어머님, 김현수, 소현우, 이영찬, 양성필입니다.”

우리는 2초 후에 웃었다. 행운목 리본이 바람에 펄쩍 점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