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도둑 / 배정인
도둑 / 배정인
춥춥하다 입동. 하늘자락이 녹아 내리고 있다. 어제도 그제도 그렇게 젖은 회색이 내렸다. 가라앉은 세상, 아무것도 구분이 되지 않은 그 어느 옛날에도 우주는 이렇게 회색의 우중에 있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지 않은, 나무가 보이지 않는, 잿물에 침잠된 그 혼곤함.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그것은 풍화작용과 같은 진행 중 상황이다.
개 짖는 소리. 개가 짖고 있다. 집안을 넘보는 도둑이 울타리를 넘어 슬금 기어드는가? 커엉컹. 저 뉘집에 개가 짖는지 나는 알 바가 없다. 알아서 무엇 하는가? 그런데 자꾸 짖는다. 컹컹, 경고를 하고 있다. 좀 있다가 또 짖는다. 컹컹컹. 위협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도적이 들었나 보다. 어디에.
혼곤의 누리엔 개가 없다. 그제서야 개를 기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지난여름에도 가을에도 내게는 개가 있었다. 산책길에도 그는 늘 나와 동행했었다. 앞 머리칼이 내려와 눈자위를 반나마 덮은, 살(煞)의 접근도 불허하는, 멋쟁이 삽살개. 흘러간 꿈을 더듬듯 내 개를 찾아본다. 없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밤새도록 찾아보아도 풀리지 않는 공허였다.
그 즈음이었다. 내 여로에 추진 겨울이 내리면서부터,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도둑이 드나들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아무 때나, 그는 슬그머니 와서는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이것저것 있는 대로 내 갔었다. 몰래 훔쳐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치 볼 일도 없이 마치 제 것인 양, 지금도 꺼내간다. 개가 짖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가 도둑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내 친구 도리랑 닮았고, 전에 나랑 뒹굴던 덕이랑 닮았고, 하이힐 높던 빨강 입술이랑 닮았다.
그에게는 ‘언제’가 없다. 현재이면서 과거이다. 다만, 현재가 과거로 현신할 뿐이다. 그가 슬쩍 해 간 자리, 그 빈자리에서 그의 흔적을 읽는다. ‘바보같이. 그건 돈도 안 되는 건데.’
며칠 전에는 지상의 양식을 먹어버리더니 이번에는 채털리 부인을 슬쩍 한다. 마담 보바리도 데려간다. 이니스프리로 가는가? 논어도 소요유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아예 통째로 한입에 먹어버린다. 백 년의 고독을 보쌈하고, 완화삼을 입고는 내가 만들어놓은 픽셀Q의 지문도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집어넣는다. 마치 다시 가져다 놓을 것처럼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드디어 소유의 종말이 오는가? 휴머니즘이 페스트를 앓으며 실낙원에 떨어지더니 장미의 이름으로 종을 울리며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자유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젊은 사자들은 어디로 갔나? 별도 소낙비에 쓸려가고. 붉은 와인 잔에 시간의 풍상이 역사를 쓰고 있다. 미로다.
워낙 크고 무거워서 못 가져갔는가? 그래도 가져가려면 이걸 가져가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보다는 많이 비싼 거니까. 최소한 라면 한 그릇 값은 수월히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도둑이련만 하필이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남겨놓았다. 따로 무슨 속내라도 있다는 듯이. 그것이 얼마나 골치 아프게 무거운가를 녀석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슬쩍 해버릴지 누가 알랴.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녀석은 한 평생 내 몸뚱이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한번도 일어서서 서성거린 적이 없다. 언제나 뻐드러져 거만을 떨며 누워있다. 천 년의 보물지도. 길을 허락하지 않는 오만.
회색의 누리에 서서, 나는 이 책 한 권이나마 제대로 먹어봤으면 하는 충동을 두드린다. 검은 아홉 시가 가까이 오고 있음에. 쓸쓸하다.
찾아야겠다, 그리 싶어 뒤를 밟았다. 콩알만 한 간을 달랑거리며 정말로 도둑고양이처럼 따라 갔다. 도둑의 집에는 사립문이 없다. 훌쩍, 도둑은 제 집도 담을 넘어간다. 나는 모가지를 뽑아 담장구멍에다 눈을 비벼 넣는다. 저기, 내 책이 널려있다. 헌데, 도둑에게도 개가 있단 말인가? 개가 짖는다. 캥캥. 도둑의 개가 나를 짖는다. 저것이 본래는 내 것이어늘. 오히려 지조론을 물고 정말 개같이 캥캥거린다. 남의 것을 훔치려는 도둑으로 낙인을 찍어댄다. 나는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파출소. 언제나 그 안의 풍경은 병색이다. 끈적거리는 페인트에 눅눅한 먼지가 죽어있다. 실물(失物)을 증명할 수 없는 물증에 대해서. 파출소는 아예 믿을 염이 없다.
“나를 훔쳐갔다니까요!”
“이봐요. 코미디 그만 하고 얼른 가세요.”
도둑이 대접 받는 사회, 나는 쫓겨났다.
빛나는 눈 들어 저 어두운 하늘 째려보는, 내 방을 지키는 개는 어디에서 무얼 하는가. 개 짖는 소리, 개소리로 듣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아직 안 가져간 내 이름 서너 자,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거라도 도둑맞지 않으려면, 눈 부릅뜨고 잠들지 않는 사천왕처럼 나를 향해서 짖는, 내 허허한 가슴에 삽살개 한 마리는 키워야 하거늘.
발목이 시도록 하늘자락이 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