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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주홍색 우산 / 김예경

cabin1212 2020. 11. 30. 06:49

주홍색 우산 / 김예경

 

 

 

오늘은 비가 와서 즐거운 날이다. "뭐 비가 와서 즐겁다고? 이 장마에?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여기저기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린다.

흥분하지 마시라. 사실은 비가 와서 즐겁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홍색 우산을 쓸 수 있어 기분이 좋다는 말이니 꼬인 마음 푸시기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상황은 재미 삼아 만들어 본 글일 뿐 실상이 아니니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이 주홍색 우산은 원래는 큰딸이 사서 쓰던 것이다. 내가 몇 번을 예쁘다고 부러워했더니 마음 약한 딸이 그만 주고 간 것으로 값이 약간 비싼 그저 보통 우산이다. 원래 주홍색은 그 자체로 밝고 우아하지만 명도에 따라서는 좀 속되고 가벼워 보일 수 있다. 이 우산은 우선 순수한 주홍색이 마음에 드는데 너무 퍼지지 않은 모양새도 포근한 맛이 있어 처음 볼 때부터 가지고 싶었다. 딸이 보기에 그렇게 탐내는 내 눈치가 너무 빤했던 모양이다.

그동안 수많은 우산을 쓰고 다녔지만 주홍색을 가져보기는 처음이었다. 비 오는 날 길에 나가 보면 대개 검은색이 많지만 그렇게 어두운 색깔보다는 더럼이 좀 타더라도 밝고 연한 색깔의 우산을 나는 좋아한다. 우중충한 날씨에 연한 색깔 우산 속은 밝고 산뜻한 분위기가 있어 좋다. 특히 하늘색 우산을 쓸 때 그런 기분을 느낀다. 아주 가끔 쓰기는 하지만 빨간색 우산을 제일 좋아하기는 한다. 빨간색 우산의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에 여간한 끈적임에도 짜증이 덜하다. 그런데 주홍색 우산은 연한색과 빨간색이 가진 두 가지 분위기를 다 가지고 있어 좀 놀랐다. 그래서 주홍색 우산을 무척 아끼고 좋아한다.

어려서부터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다. 비 오는 날을 위해 나만의 우산을 꼭 단속해두는 거다. 다른 식구 손에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 내 우산이 항상 비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랄까. 비 오는 날 그 우산을 펼쳐 들고 나서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에 외출이 즐겁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라며 저쪽에서 또 비꼬는 소리가 날아온다. "우산이 뭐 다 거기서 거기지 노인네가 호들갑은."

그런데 이렇게 나잇값 못하고 비 오는 날을 즐기는 것이 샘이 나는지 꼭 마가 끼어드는 것이 탈이다. 내 것으로 마음먹고 마련해두는 우산마다 꼭 없어지는데, 사실은 그 주홍색 우산도 어디론가 없어져 속이 상해 이 글을 쓴다. 우산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이번 비가 시작되면서 알았으니 나의 소홀함에 더욱 속이 상한다.

이웃에 사는 딸네가 제 집처럼 드나드는 형편에 사실 우산 같은 건 임자가 따로 없기도 하다. 손주들 등쌀에 단단히 단속해둔 내 우산도 걸핏하면 끌려 나오기 일쑤다. 어느 우산이든 보이지 않으면 일단 딸부터 다그치고 본다. 딸은 없어지는 건 다 저네 탓이냐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너희 아니면 누가 갖고 나가느냐고 일갈하곤 한다. 그래 보았자 없어진 우산은 없어진 우산이다.

주위에서 들어보면 우산을 잃어버렸다는 사람만 있지 주웠다는 사람은 드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리는 우산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간혹 누가 잊고 두고 간 우산을 발견할 때가 있지만 한 번도 가져와본 적은 없다. 설사 버린 것이라 해도 내 것이 아닌 이상 손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멀쩡한 우산인 경우 누가 가져다 쓰면 다행이지만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면 적잖은 손실이기는 하겠다.

주홍색 내 우산은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아직은 깨끗하고 탄탄하니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을 것 같지는 않고 색깔이 색깔이니만치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어느 여자가 쓰고 있지 않을까 싶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 여자가 내 주홍색 우산을 주워온 것이라면 함부로 다루지 않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나처럼 그 색깔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아늑하고 얌전한 모양새를 알아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얼빠진 나처럼 어딘지도 모르게 놓고 다니지 말고 오래도록 잘 써주었으면 정말 좋겠다.

주홍색 내 우산이 없었다면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은 장화도 꺼내 신고 하다못해 시장이라도 나갔다 왔을 텐데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냥 들앉아 누가 비꼬거나 말거나 이 장마에 비가 와 기분 좋다는 상상 글이나 한 줄 써본다. 잃어버린 주홍색 우산이 하도 안타까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