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푸른 미소 / 정복언

cabin1212 2020. 12. 18. 06:08

푸른 미소 / 정복언

 

 

 

얼마 전 아내가 시골에서 볼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플라스틱 모종판 하나를 들고 왔다. 20여 개의 월동배추가 올망졸망 푸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아침에 텃밭에 삽질하고 옮기겠단다.

아내의 생체시계는 올빼미형이고, 나는 종달새형이다. 별로 고장이 없다. 이튿날 새벽에 깨어나 컴퓨터를 뒤적이다가 동살보다 먼저 삽을 들었다. 아내를 도우려는 생각과 더불어 어린 생명을 빨리 흙의 품에 안겨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였다.

삽으로 흙을 갈아엎노라니 지렁이들이 보인다. 시비를 안 한 대도, 그럭저럭 푸성귀를 키울 수 있는 지력을 지닌 듯하다. 꽃삽으로 작은 흙덩이를 부수며 적당한 간격으로 배추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나갔다.

그런데 움직이던 일손이 멈칫한다. 어느 생명체의 무리에서나 뒤처지는 놈이 있게 마련이듯이 모종 두 개는 생기를 잃은 채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같은 조건이었을 텐데, 어찌 물을 받아먹지 못하고 버림받았을까. 심을까 버릴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놈들도 정성스레 심었다. 생명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는 믿음에서였다.

물뿌리개로 듬뿍 물을 주며 마음을 전했다. ‘너희들 모두 싱싱하게 살아야 해.’

아침저녁 물을 줄 때면 시든 녀석에게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일까, 이들도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사흘이 지나자 모두가 내게 고맙다고 푸르게 인사했다.

고등동물이라는 인간이 생명을 함부로 대할 때면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에 빠지곤 한다. 특히 어린 피붙이와 함께 극단적인 길을 선택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보다 더 큰 죄악이 있을까. 제 몸으로 낳았더라도 제 생명이 아니지 않은가.

충실히 살아야 할 뿐, 생명을 세우고 눕히는 건 인간의 몫일 수 없음을 또 한 번 체험했다.

배추가 목말라 하는지 살피러 텃밭을 향하는 발걸음은 늘 가볍다.

, 생명의 푸른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