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봄비 / 김응숙
봄비 / 김응숙
행복한 당신께.
간밤에 저는 쉬이 잠들지 못했습니다. 푸석한 잠의 각질들이 자꾸만 들뜨는 밤이었습니다. 아무리 이불깃을 여미어도 잠은 단단해지지 않았습니다. 반투명의 눈꺼풀 안쪽으로 희끗한 형상들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습니다. 잠결의 기슭에서 나아가지도 밀려나지도 못한 채 얕게 떠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제 귓바퀴가 소리 없이 넓어져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더니 창문을 넘고 마당의 나무 아래로 깔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잘 반죽된 밀가루 덩어리를 밀대로 펴고 또 펴는 것 같았습니다. 얇아진 귓바퀴 위로 작은 빗방울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빗방울들은 텀블링 위의 아이들처럼 그렇게 소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조용히 한두 번 몸을 굴리더군요. 둥글고 작은 빗방울들의 탄력을 갈급한 대지가 쑤욱 빨아들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빗방울들은 튀지도 않고 토닥토닥 대지 속으로 스며들어갔습니다. 그 소리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처럼 제 귓가에서 아득하게 울렸습니다.
행복한 당신, 당신도 빗소리를 듣고 있었나요?
빗소리는 다시 마당을 지나 창문을 넘고 침대를 올라와 저의 고막을 울렸습니다. 잠시 귀를 기울이니 빗소리는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 한 음 뒤에 한 음이 따르고 그 음들 사이에 조금 멀거나 가까운 곳에 떨어지는 다른 한 음이 섞이는 고즈넉한 연주, 한밤중에 갑자기 시작되었지만 오래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던 듯 익숙한 리듬, 밖으로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안으로 스미는 음들, 한 결 같이 계속되는 나지막한 음들의 쓰다듬음. 저는 빗소리에 집중하며 잠결에서 헤어 나왔습니다. 눈을 뜨니 묵직한 어둠은 아직 방안에 머물러 있더군요. 잠결에서는 분명히 빗소리가 제 안에서 공명하고 있었는데, 잠을 깨니 빗소리는 밖으로 밀려나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커튼을 젖혔습니다. 빗줄기는 조금 거세진 듯 했습니다. 유리창에 부딪힌 빗방울들이 투명한 캔버스에 떨어진 묽은 물감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잠깐 형태를 유지하다가 곧 허물어지는 빗방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습니다. 마당가 키 작은 가로등의 불빛에 반사되며 빗방울들은 반복해서 유리창을 두드렸습니다. 흘러내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빗방울들 속에서 문득 저는 제 두 눈을 발견했습니다.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제 두 눈은 빗방울들 사이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갈증을 느낀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당신은 그 이유를 아시나요? 저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한기가 훅 밀려들었습니다. 동시에 비릿한 물비린내와 메케한 흙냄새와 아릿한 풋내도 섞여들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이 안개처럼 퍼져 꿈밖의 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견고한 구슬 같이 빛나는 것이 현실감을 주었습니다. 내민 손가락 사이로 빗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의외로 차갑더군요. 저릿한 통증이 팔꿈치를 지나 어깨뼈에 와 박혔습니다. 저는 창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상상했습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저는 맨발입니다. 빗방울은 세례를 주듯 올곧이 제 정수리로부터 흘러내립니다. 마른 나뭇가지 끝에 달린 물방울들처럼 제 머리카락 끝에도 올올이 구슬이 맺힙니다. 저는 흙물이 든 발꿈치를 끌며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는 동안 옷이 젖고 몸이 젖고 마음도 젖습니다.
저는 알몸으로 나무 밑에 앉아있습니다. 제 몸에서는 아지랑이처럼 더운 김이 나는군요. 모공으로 빗방울들이 스며들고, 스며든 빗물로 몸이 퉁퉁 불어납니다. 특히 손가락 끝이 툭툭 불거집니다. 몸속의 뼈가 빗물에 녹아 흐느적거리고, 그 틈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생겨납니다. 마치 제가 녹아 없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때 불티같은 한 숨이 명치끝에 머뭅니다.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갑자기 몸 안에 탄력이 생깁니다. 날카로운 긴장이 손끝으로 내닫습니다. 그것은 점점 뾰족해집니다. 그것이 제 살갗에 닿기 전에 저는 상상을 멈추었습니다. 찢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니까요.
어두운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상상을 멈추자 저와 빗방울 사이에는 투명한 유리창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사실 유리창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간밤의 비에 저는 유독 젖고 싶었고, 또한 젖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창은 그 존재를 분명히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안온과 갈망 사이에서 유리창은 흔들렸습니다. 빗방울들은 여전히 허물어지면서도 유리창에 머물렀고, 제 두 눈을 빌려 저를 깊이 바라보았습니다.
행복한 당신, 당신은 제가 왜 당신을 행복한 당신이라고 부르는지 알고 계신가요?
언젠가부터 저는 당신을 느끼고 있었지만 당신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로부터 생겨났지만 지금은 너무나 멀리 떠나 있습니다. 흔히들 잃어버린 나의 반쪽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헛말입니다. 어느 것도 반쪽으로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온전히 있었으나 유리창 너머에 존재하는 당신, 당신을 한 번만 껴안아 볼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너무 크고 단단합니다. 당신은 절대로 쪼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언제나 총체적인 당신. 당신은 당신을 껴안을 수 있는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오롯이 온전히 품을 것. 이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가 너무나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으니까요. 당신을 껴안으면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습니다. 저는 당신과 분리된 후로 이상하게도 점점 더 작아졌습니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품은 쪼그라들었습니다. 이런 제가 당신을 품기란 요원해 보입니다. 그래도 그리운 당신, 저는 당신에게 행복한 당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마치 곁에 있는 듯 불러보곤 합니다.
그동안은 건조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누구는 유례없는 가뭄이라고 했습니다. 골짜기마다 물이 마르고 저수지들도 민망한 배를 드러내었습니다. 스치는 바람에서도 먼지 냄새가 났습니다. 메마른 날들이 마른 책장을 넘기듯 무수히 지나갔습니다. 뿌리가 얕은 초목들의 잎은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이 말라보였습니다. 오랜 세월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렸을 큰 나무들도 가지 끝이 비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피로한 표정이었습니다. 간혹 마른기침 같은 바람이 불었지만 구름은 모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도 세월은 그와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 제 살을 찢으며 두 번의 출산을 경험한 이후로 제 몸은 말라만 갔습니다. 한 때 푸른 강물처럼 넘실대던 물결은 점점 수위가 낮아졌습니다. 나이 오십을 넘기자 바닥을 드러내고, 언제부터인가 질척이던 바닥마저 하얗게 말라버렸습니다. 스스로를 마른 나뭇가지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행복한 당신, 저는 지난겨울 내내 마른 숲을 걸어 다녔습니다.
서로 가지를 맞댄 맨몸의 나무들은 깊은 꿈에 빠진 듯 했습니다. 저는 큰 나무 둘레를 한 바퀴 빙 돌았습니다. 발밑에서 바싹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습니다. 한때 이 낙엽들은 나무에게 모든 의미이며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햇빛 다발이 빗살처럼 내리던 뜨거운 날들에 잎들은 나뭇가지를 덮으며 찬란하게 흔들렸겠지요. 나무는 정말 그런 날들을 잊었을까요? 찬바람이 불고, 끝까지 버티던 마지막 잎사귀의 꼭지가 제 몸에서 떨어져나가던 그 아뜩했던 순간도 잊은 것일까요? 나무는 낙엽들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습니다. 저는 나무에 기대앉았습니다.
문득 지금 나무가 상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쭉하기만 한 체형과 거친 갈색의 표피 속에는 생명의 수맥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테니까요. 생존을 위한 모든 변화와 탈피에 상상은 꼭 필요한 것이지요. 상상은 살아있는 것들의 숙명입니다. 생명이 깃든 몸속에는 상상도 같이 깃들어 있습니다. 나무의 상상은 혹한의 날들에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끝날 것만 같이 눈보라가 치던 날, 나무의 몸속에서 스멀거리는 상상 하나가 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상상 한 점에 마지막 온기를 모으며 나무는 겨울을 날 테지요. 저는 그것이 나무가 꾸는 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행복한 당신, 그거 아세요?
모든 꿈은 꿈꾸는 자보다 크고 단단하다는 점에서 당신과 많이 닮았다는 것을요. 그래서 꿈들은 쉬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지요. 꿈을 꾸어본 자들은 알고 있어요. 자신이 꾼 꿈을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를 찢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그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꽉 낀 깍지처럼 생각과 생각은 맞물려 있습니다. 깍지의 미세한 사이마저 온갖 감정들이 아교풀처럼 엉겨 붙어 있어 도저히 틈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저의 표피는 여전히 마른 나뭇가지처럼 딱딱하고 완고합니다. 이런 제게도 봄비가 스밀까요?
유리창 너머는 아직 어두웠습니다. 가로등의 희뿌연 반사광 사이로 끊이지 않고 내리는 봄비는 무슨 주문 같기도 했습니다. 봄비가 마른 나뭇가지를 비단실처럼 친친 감아대었습니다. 은근하고 집요한 몸짓이었습니다. 젖어서 검은 윤기가 흐르는 나뭇가지 끝이 부풀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야릇한 통증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슬아슬한 배반의 기류가 나뭇가지를 타고 전류처럼 흘렀습니다. 지난 가을의 그 가혹했던 추락을 깡그리 잊고 또 다시 나무는 스스로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봄비가 배인 공기 속으로 야릇한 배반의 향기가 자욱이 퍼졌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산수유 눈 하나가 노랗게 터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피었다가 지고야마는 꽃들이었습니다. 어쩌면 나무에게는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봄비 때문일까요? 말라버린 모든 것들에 기어이 스미고야 마는 저 봄비 말입니다. 이제는 멈출 수 없어 보였습니다. 빗소리와 함께 봄비에 흠뻑 젖은 존재들이 툭툭 자신들의 표피를 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최초의 꽃이 피고, 그곳에 행복한 당신이 활짝 웃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틈을 보이지 않는 어둠도 때가 되면 자신을 가르고 어제보다 더 빛나는 세상을 내어놓을 것입니다. 봄비를 갈급하게 빨아들인 대지도 굳었던 자신을 허물어뜨리고 끝없이 푸른 풀밭을 토할 것입니다. 모두들 당신을 향해 뜨거운 숨을 뿜으며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때의 두려움은 날카로운 염원이 되어 스스로를 가릅니다. 숲속으로 복음처럼 소문이 퍼집니다. 두런두런 숲이 깨어납니다. 이제 눈을 뜨고 당신을 만날 시간입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와 닿습니다.
행복한 당신, 봄은 배반의 계절입니다.
저는 커튼을 닫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불을 꼭꼭 여미고, 마치 땅속 씨앗처럼 웅크리고 누웠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저 봄비에 푹 젖기를요. 그리고 풀어헤쳐지고, 마침내 찢어져 버리기를요. 그래야 당신을 만나 품안 가득 안아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자신이 자신을 찢고 나오는 배반의 은총을 기다리는 동안, 토닥토닥 봄비는 밤새 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