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유빙렬(釉氷裂) / 남지은
유빙렬(釉氷裂) / 남지은
나의 분청자기는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낭자하다. 처음에는 균열 때문에 불량품이 아닌가 싶어 신경 쓰였다. 그러나 전통공법으로 만들어진 도자기는 균열이 생기기 마련이라 한다.
균열을 얼음에 생긴 금과 같다고 하여 빙렬이라고도 한다. 기계로 찍어내는 도자기에는 거의 빙렬이 없지만 수작업으로 만든 것은 대부분 빙렬을 보인다. 약 1,300℃에서 구운 도자기는 가마에 열이 식으면서 차가운 바깥 공기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태토는 조금 수축하고, 유약 부분은 많이 수축하는 계수 차이에서 빙렬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처음 봤을 때 그 비색의 자태보다 빙렬이 더 눈길을 끌었다. 자잘한 금이 수없이 그어져 그 또한 하나의 무늬를 이루었다. 도자기의 빙렬 현상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도 계속된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하다. 한겨울 호수의 얼음판에서 일어나는 빙렬은 "쩌정쩌정"소리가 요란하고도 괴기스럽다. 도자기의 미세한 빙렬 소리는 아주 미미하여 우리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마에 차곡차곡 쟁여 넣은 도자기들이 무수하게 빗금을 그으며 단체로 질러대는 비명소리가 화음을 이루게 된다. 이때에 나는 소리를 유빙렬 소리라고 한다. 금 하나하나가 살 트는 아픔을 겪으며 지르는 소리. 애초에 태토가 도공을 만나는 순간 그 아픔은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유빙렬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비수가 스치는 소리일까. 휘파람 소리일까. 거문고 뜯는 소리일까. 그 소리가 몹시 궁금하여 무작정 경주의 한 도요를 찾았다. 그러나 휴식 중에 있는 가마에서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이미 지나간 소리라도 듣고 싶어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향해 가마는 큰 입을 벌리고 마주보았다. 땀 흘리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그 신비의 소리를 들으려 하느냐며 나무라는 것 같기도 했다. 부끄러운 내 뒷모습을 향해 도공은
"그 소리는 마치 요정들의 음악회 같아요."
라고 일러 주었다. 아마도 도공은 유빙렬 소리를 어떤 정령들의 음악회로 생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작품을 대하면 작가의 마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마도 내 찻잔을 만든 도공은 소시민을 생각하며 만들지 않았나 싶다. 내 수중에 들어와 빙렬마다 거무스레한 차때가 끼도록 사용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차때는 조금 불결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다기를 얼마나 사용했는지의 지표가 되기도 한다. 차심이라고도 하는 이 차때는 찻물이 낸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거슬러 가다보면 찻잔을 스쳐간 사람들까지 훤히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는 귀양지에서도 차를 즐길 정도였다. 그는 차 끓이는 소리를 대밭에 부는 바람 소리 같다고 하였다.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대밭의 바람소리를 왜 하필 차 끓이는 소리에 비유하였는지 모르겠다. 나에겐 차 끓이는 소리가 한없이 정겹기만 한 것을.
일본의 국보가 된 조선의 막사발을 처음 보았을 때 참 황당했다. 태깔이 고운 것도 아니고, 균형이 제대로 잡힌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나라 제품이 일본 국보가 된 것에 심사가 뒤틀리기까지 했다. 투박하고, 유약이 덕지덕지 붙은 평범한 막사발을 그들은 왜 그다지 높이 평가했을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막사발은 순박하고, 자연미가 있다. 막사발로 다도를 즐겼던 일본인에겐 자연스런 것에 가장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움에 열광하는 그들의 문화와 사고를 잘 나타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일본 명문 꽃꽂이 가문의 당주는 어린 양딸을 데려다 키웠다. 딸이 장성하여 아리따운 처녀가 되니 양부의 눈에는 한 송이 꽃으로 보였다. 부녀간에 마주 앉아 꽃꽂이 강습을 주고받던 어느 날이었다. 양부는 수반 위에 1주지를 세우는 딸의 손목을 비틀고 싶었다. 2주지를 세우는 딸의 몸뚱이를 철사 줄로 꽁꽁 묶어 변형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3주지를 세울 때, 드디어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딸을 때리며 꺾어버렸다. 딸의 몸에서 빙렬이 일어나고 유빙렬 소리가 터져나 나왔다.
차츰 그 생활이 거듭되면서 딸은 오히려 꺾이는 것을 즐겼다. 비틀고 묶이고, 꺾이는 행위에 쾌감을 느끼며 양부에게 매달렸다. 그런 딸을 자연에서 꺾어낸 순박한 꽃이라며 흡족해 하는 양부를 보며 나는 속이 메스꺼웠다. 지켜주기보다는 소유욕에 불타는 그들이다. 영화를 계속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가지가 잘려나간 꽃은 영문도 모르고 춤을 춘다. 주위에 향기가 풍기고 드디어 수반 위에 물이 흐른다. 세상에 둘도 없는 꽃, 가장 향기로운 꽃, 가장 위험한 꽃.
예술적 잣대를 들이대고 영화를 보려는 내 심중에도 빙렬이 일어났다. 예술은 이성과 지성만으로는 꽃피울 수 없는 것인가.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작품을 외설이라고 치부하는 감정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까. 예술과 외설 사이를 방황하며 오랜만에 다기를 꺼낸다. 뜨거운 찻물을 다기에 붓는다. 빙렬마다 찻물이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