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누실명陋室銘 / 김주남

cabin1212 2021. 4. 30. 06:33

누실명陋室銘 / 김주남

 

 

 

햇살이 얼굴까지 찾아든 기척에 눈을 뜬다. 고요하다. 깊은 잠 꿈결처럼 남편이 나가는 기척을 들은 것도 같다. 사방을 둘러본다. 낡은 문짝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누실이다. 하나뿐인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그 냄비를 씻어 다시 물을 끓여 커피를 탄다. 먼저 코로 향을 마시고 다음에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따뜻한 느낌을 즐긴다. 이토록 편안하고 여유 있는 아침이라니. 실컷 자고서 싱긋이 웃으며 일어나는 어린아이처럼 느긋하고 푸근하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면 안 된다고, ‘여자가!’ 를 후렴처럼 붙여 잘타할 할머니도, 아플 때가 아니라면 낮에 누워 버릇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를 어머니도 안 계시는데 그 꾸지람만 유전처럼 박혀서 날이 훤한 기척이면 벌떡 일어나곤 했다. 아이들의 등교가, 남편의 출근이, 누군가의 아침밥이, 또 어떤 할 일이 나를 오래 누워있도록 두지 않았다.

남편이 C시로 발령이 나면서 관사가 생겼다. 어린 시절 산처럼 높아 보였던 분들이 살던 관사, 관사의 자가 주는 어떤 신뢰와 오랜 동경 같은 것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전원주택을 사두고 주말이면 텃밭을 가꾸러 가는 이웃도 부럽던 차였다. 활짝 핀 얼굴로 뒤를 따르는 나에게 남편이 한마디 했다.

너누 기대는 하지마라. 오래된 아파트다.”

내 기대가 컸던가. 오래된 아파트라고는 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싱크대 타일은 깨져 있었고, 벽지도 장판도 너무 낡아 있었다. 거실을 겸한 방의 문이 여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나마 안방 벽지만 새로 바른 듯했으나 그마저도 두 벽이 만나는 모서리가 시커멓게 변해 축축했다. 천장 등갓 위도 젖은 얼룩이 심한데다 화재감지기마저 덜렁거렸다. 경비아저씨가 올라와 보고는 곰팡이가 아니라 물이 새는 것 같다고 했다.

비어있는 집, 주인도 아니고, 객도 아닌 사람들이 어쩌다 머물다 가는 집이어서 그런가 보았다. ‘선관 주의 의무를 들먹이며 마땅히 보수를 해달라 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나와, 어쩌다 회식이 있거나 하여 늦게 되는 날에나 머물 건데 그냥 조용히 쓰다가 반납하면 된다는 남편이 옥신각신했다. 자꾸 일을 만들 거면 반납해버린다는 엄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다행히 윗집에서 누구 방수공사를 하게 되면서 안방만 새로 도배를 해 주었다.

그래도 이데 어디냐며 도배도 한 김에 신접살림을 차리는 기분으로 부엌살림을 사러 나갔다. 집에서 가져올 수도 있지만, 기분이 그게 아니었다. 밥공기 둘, 냄비 하나, 마그잔 두 개를 사 왔다. 그리고 집에서 수저 두 벌과 과도 하나를 들고 왔다. 그것이 부엌살림 전부다.

텅빈 충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다. 살림살이가 없으니 치울 것도 없고 아이들이 없으니 챙길 것도 없다. 일에 치이지 않으니 짜그락댈 일도 없고, 달리 쳐다볼 사람이 없으니 둘이서 대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건이 들어설 공간에 여유가 들어차 마음이 한가롭다. 그러니 세간을 더 늘일 생각이 없다. 아니 늘여서는 안 된다. 이대로 충만하다. 내일은 여기서 실컷 자고 갈 거니까 깨우지 말라고 새벽에 일찍 나랄 일이 있는 남편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이번엔 달지 않은 커피를 한 잔 더 끓여와서 미니 밥상 겸 책상 겸 찻상 위에 얹어놓고 큰 대자로 벌렁 누워본다. 한갓진 이곳에서는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가방에서 이제 읽다 만 책을 꺼내 든다. 아침에 돌아가려던 마음이 싹 없어 진다. 온종일 뒹굴며 이 텅 빈 충만을 누릴 참이다.

산이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살면 이름을 얻고, 물이 깊어서가 아니라 용이 살면 영험한 것이다.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군자가 사는 곳에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

유우석의 누실명을 떠올리며 이 시간 나는 이 누실에서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