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있잖아, 상임 씨 / 정재순
있잖아, 상임 씨 / 정재순
지하철 타러 가는 길목에 시화전을 열고 있었어. 많은 발걸음들이 무심히 지나가더군. 힐끔 봤더니 뒤늦은 공부를 하는 고희 남짓한 할머니들의 마음이 소복소복하더라.
천천히 한 편씩 읽어 봤거든. 솔직한 글귀가 아삼삼하니 꼼짝할 수 없는데 상임 씨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잖아. 수학문제를 풀고, 영어도 읽을 수 있다는 일흔 살 여학생은 제일 보고픈 사람이 아버지래. 이제 맨날 웃고 산다며 졸업장을 받으면 꼭 엄마부터 보여주겠다는 예순여섯 살 학생 때문에 눈시울을 붉혔지 뭐야. 상임씨도 여기 이 분들과 어울리고 싶을 테지. 한때 가방에 국어책과 공책을 넣고 동네 한글공부방을 다녔으니까.
지아비를 부를 때면 ‘저거 아부지요’ 라는 상임 씨가 조그만 상 앞에 다소곳이 앉은 날이었지. 아버지가 내어준 숙제를 연필로 또박또박 써내려가더라. 공책 한쪽 면은 삐뚤빼뚤한 이름 ‘정상임’이, 그 옆면에는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 강아지’가 빼곡하게 채워졌어. 받침 하나 빼먹지 않았다고 아버지가 칭찬하자 철없는 아이처럼 좋아했잖아. 응석부리듯 ‘저거 아부지요’를 몇 번이나 되뇌는 상임 씨를 다정다감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버지가 몹시 낯설었지. 하지만 내겐 더할 나위 없는 따뜻한 기억이야.
영혼이 자유로웠던 아버지는 집안일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잖아. 시골생활을 접고 맞닥뜨린 도시가 상임 씨에게 얼마나 벅찼을까. 다섯 아이를 건사하려고 돈을 살 일이면 무엇이건 붙들고 매달렸었지. 홀치기와 천에 구슬 달기는 물론이고, 화장품을 팔러 이집 저집 열어주지 않는 문을 두드렸고, 고등어를 머리에 이고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어. ‘고등어 사이소’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해질녘 집으로 오는 손엔 언제나 찬거리가 들려 있었지. 한 순간도 상임 씨 당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을 걸.
그때가 언제더라. 무슨 연유인지 대중가요에 관심을 보였지. 당시 전파를 많이 타던 최병걸의 <진정 난 몰랐었네>를 18번곡으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야. 작은오빠가 ‘발길을 돌리려고 바람 부는 대로 걸어도’라고 첫 구절을 부르자 상임 씨는 눈을 지그시 감고 똑같이 하더군. ‘돌아서지 않는 것은 미련인가 아쉬움인가’ 오빠가 선창을 하면 웃음 가득한 얼굴로 흥얼흥얼 따라 불렀어. 상임 씨의 그런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지. 팍팍하고 고달픈 삶이여도 생때같은 자식들이 눈에 밟혀 차마 돌아설 수 없었을 거야.
혹시 상임 씨라고 하니까 서운해? 아버지를 만난 후부터 이름을 잊고 살았잖아. 늦었지만 이제라도 상임 씨로 불러주고 싶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정겹고 포근했던 그 날이 난 아직도 생각나. 측백나무가 울타리 쳐진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소꿉놀이를 하는 내게 상임 씨가 넌지시 말을 붙였지.
“우리 끝순이 시집가면 뽀얀 쌀밥에 고등어 굽고 김 구워 소고기국이랑 엄마 밥해 주나.”
얘기하는 음식들을 곰곰이 그려보던 내가 고개를 힘주어 끄떡였어.
“콩 조림이랑 계란찜도 줄 끼다.”
그 날이 곧 올 것 마냥 쫑알쫑알 대는 내 입술을 보며 환한 얼굴로 손을 꼭 잡아주었거든. 이제야 알겠어. 잠시라도 어린 내게 위안 받고 싶었던 상임 씨 심정을. 이렇다 할 이유도 모르면서 콩닥콩닥 설렜던 까닭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그런 상임 씨의 삶이 100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의사가 함부로 말을 내뱉었어. 허허, 믿을 수 없다는 듯 웃던 모습이 잊히질 않아. 하늘이 무너진 듯 난 병원 계단에 넋을 놓고 앉았었지. 언제든 찾아가면 볼 수 있는 상임 씬데 말이 되냐고. 기적을 바라며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느라 같이 여행 한 번 못 갔어.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고 말았지. 세상천지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은 것처럼, 살아 있다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만사가 허무하게 여겨지더라. 상임 씨가 없는데도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엔 달이 뜨더군. 꽃잎 날고 봄비 내리는 길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거리를 눈물로 적시며 하루하루 이겨냈어. 우리 곁을 떠날 때가 딱 지금 내 나이, 대체 뭐가 그리 급했던 거야.
몰라볼 만큼 뼈만 앙상해진 상임 씨가 속이 답답하다고 했어. 아픈 자리를 만졌는데 커다란 바윗덩어리처럼 딱딱해서 얼른 손을 내렸지.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 했거든. 상임 씨, 왜 그렇게 참았던 거야. 어른이 다 된 자식들인데 아파서 더는 못 견디겠다고 짜증부리면 어때서. 영양제 맞추려고 간 응급실에서 성미 까다로운 아버지를 걱정하다 갑자기…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서러움이 가슴에 돌덩이로 남았어.
상임 씨는 열 번 스무 번을 물어도 한결같은 어조로 얘기했었지. 나도 그렇게 대해 주고 싶었어. 돌고 도는 것이 삶이라고,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고 말했었잖아. 우리한테도 기회를 좀 주지 그랬어. 다음 생에는 내가 상임 씨 엄마로 태어나 정성껏 보살피고 더 많이 챙겨 줄게.
희한하지, 세월이 약인가 봐. 추억주머니에서 이렇게 담담히 꺼내 볼 여유가 생겼으니 말이야. 부탁 하나 들어줘. 바람결에라도 잠시잠깐 실려와 나랑 눈 한번만 맞추고 가. 지치고 힘들 땐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던 상임 씨 손길이 너무너무 그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