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도마 / 임수진
도마 / 임수진
재래시장 입구, 횟집 앞 전봇대 아래를 지날 때였다. 낯익은 물건이 마음을 잡아당겼다.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았다. 전봇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 건 상처 많은 나무 도마였다. 그것은 해질녘 나를 배웅하고 섰던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톡톡톡, 엄마는 아침마다 칼질을 했다. 칼질 소리는 꿈길 같았다. 아득하고 달콤하고 깊었다. 밥상에 무와 두부를 넣고 자작하게 끓인 된장이 올라왔다. 한 숟갈 입에 넣으면 엄마 냄새가 났다. 엄마가 해 준 건 뭐든 다 맛있었다. 무와 두부만 넣고 끓여도 깊은 맛이 났다. 도마를 쓰고 나면 엄마는 깨끗이 씻어 볕이 잘 드는 곳에 세워 두었다. 어느 한가한 날 우연히 도마가 햇빛에 말라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수많은 칼자국, 그것은 빗날무늬 토기를 연상시켰다.
엄마는 하루에도 여러번 도마를 썼다. 국수를 썰고 호박을 썰고 감자와 김치를 썰었다. 칼질 소리는 경쾌했다. 규칙적인 리듬이 들어가 있어 듣고 있으면 즐거웠다. 어쩌면 내 몸이 파블로프의 개처럼 칼질 소리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칼질할 때의 엄마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덩달아 나도 즐거웠다. 이제 곧 뭔가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엄마의 칼질이 매번 신명 났던 건 아니다. 리듬감 없이 툭툭 끊어질 때도 있었다. 고기와 생선 타령을 하는 우리에게 나물 반찬만 해 줄 때 특히 그랬다. 어쩌다 아버지가 비계가 많이 들러붙은 돼지고기를 사 들고 오신 날은 도마 소리는 다시 경쾌해졌다. 소리는 신김치 냄새와 더불어 대문 밖까지 퍼져나갔다.
그런 날 도마엔 다른 날보다 더 많은 상처가 났지만 도마의 상처가 깊을수록 밥상은 푸짐했다. 여러 개의 숟가락이 경쟁적으로 냄비 속으로 들어갔다. 냄비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바닥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엄마의 숟가락이 냄비 속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 순간 잠깐 마음이 쓰였지만, 그 또한 돌아서면 잊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다.
엄마 숟가락은 돼지고기가 든 냄비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줄 알았다. 엄마는 그냥 칼질만 잘하는 줄 알았다. 엄마도 누군가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싶었을 것이고,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를 드시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칼질 소리를 들으며 눈 뜨고 싶은 아침이 왜 없었을까. 엄마도 부모 역할이 처음인데 나는 왜 엄마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왜 태어날 때부터 엄마라고만 생각했을까.
밥하고 빨래하고 밭일하고 청소하는 것도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춘기 때 면도칼처럼 군것도 엄마라서 그랬다. 사는 일이 얼마나 안간힘을 써야 되는 일인지를 몰랐기에 제발 도마 좀 바꾸라고, 누가 요즘 나무 도마를 쓰느냐고! 칼이 도마를 내리찍을 때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김치나 두부, 호박에 나뭇가루가 섞인다고, 그 나무를 우리가 먹게 되는 거라고, 앙칼지게 말하고 돌아선 날 엄마의 가슴엔 생선을 자르기 위해 내리쳐 찍은 도마만큼의 깊은 상처가 났을 것이다.
칼질 소리와 도마의 깊은 상처가 나를 키웠다는 건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알았다. 내가 엄마가 된 후 엄마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였으니 결국 나는 엄마 가슴에 난 빗살무늬 상처를 어루만져줄 기회마저 잃고 말았다.
전봇대 아래에 버려진 저 도마 역시 누군가를 위해 닳아왔을 것이다. 움푹 파인 상처 사이사이에 박힌 비늘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걸로 봐서 생선가게에서 사용하던 것 같다. 주인이 누구였든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건 그들도 나처럼 도마의 상처를 먹고 산 것만은 사실이다.
수많은 생채기를 품고 전봇대에 기우뚱 기대 선 도마, 햇살과 바람만이 도마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고 있다. 그 위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골목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섰던 엄마 모습이 투영된다. 나는 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서성인다. 내 몸이 나무 도마의 유전자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