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벼꽃 / 송귀연
벼꽃 / 송귀연
논두렁에 올라선다. 풍 향내가 삽사름하니 코에 와 닿는다. 벼 대궁의 수술들은 피어 있다기보다 떡고물처럼 붙어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몇 천 년 만에 핀다는 우담바라를 닮기도해 경이롭다. 미동 없이 숨죽이며 감았던 눈을 다시 뜬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꽃으로 느낄 수 없는 작은 존재들. 이 놀라운 개화는 아주 짧은 시간에 생을 접고 황망히 떨어져 버린다.
벼꽃은 찰나의 일생이다. 대체로 입추에서 말복 사이에 꽃이 핀다. 연초록 벼 껍질이 벌어지면 새하얀 수술이 고개를 내밀면서 수정이 이뤄진다. 그러나 열렸던 껍질이 불과 한 시간 여 만에 다시 닫히면서 꽃의 생애는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삶을 살다 간다.
어릴 적 이웃 친구네는 장애아가 있었다. 팔남매 중 막내였다. 걷지 못하는 대신 앉은 자세에서 두 다리를 이용해 개구리 헤엄치듯 방바닥을 쓸고 다녔다. 그 애 부모는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장애를 가진 자식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아이 이름조차 짓지 않았다. 그렇게 두 해 정도를 살았을까. 친구네 가족 모두가 쉬쉬하는 가운데 소문은 새나왔다. 그 애가 죽었다고. 생각해보면 일어서지 못한다는 것 뿐 먹성 좋았던 명랑한 아이였다. 한동안 천진스레 웃던 아이의 표정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순간을 살고 간 벼꽃 같은 아이였다.
바닷가에 서서 건너다보이는 화려한 불빛야경을 카메라에 담아본 적이 있다. 실제풍경의 빛을 살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초보적 수준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리개와 셔트, 속도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잘 조절해야 좋은 작품을 얻을 수가 있다.
반 고흐는 빛, 색채, 그리고 영혼의 화가이다. 예부터 인상주의화가들은 빛이 세상에 닿는 순간의 찰나에 집중하여 빛의 축복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들의 화법이 고흐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태양이 떠올라 황금으로 물드는 저녁까지 풍경에 담긴 내면의 빛을 포착한 그림이다.
불교에서는 찰나를 시간의 최소단위라 말한다. 생기고 멸하면서 계속 된다는 의미는 극히 짧은 시간, 겁劫, 어떤 현상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 순간이다. '찰'이라는 글자가 지니고 있는 시공간의 둘레는 '무한'이며 이는 완전한 해탈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겁은 천지가 한 번 개벽할 때부터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시간을 가르킨다. 그것이 눈 깜짝할 사이라는 의미와 뜻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러고 보면, 찰나니 영원이니 하는 시간적 단어들이 모두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들인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TV에서 샌드아트에 관한 영상을 접했다. 모래를 이용하여 손으로 그려내는 것이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모래를 만지는 작업은 심리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고운모래를 뿌리거나 지우면서 시시각각 만들어가는 모습들이 흥미로웠다. 쉬운 것 같지만 결과물이 나오기까진 섬세함과 노련함이 요구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순간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첫사랑은 농도 짙은 진한 무언가가 아닌 파스텔톤의 색감을 내는 투명하고 순수한 느낌이 아닐까? 이 십리 논두렁길을 돌고 돌아 공민학교 같은 중학교를 다녔다. 학교 선생님들은 주로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봉사하는 분들이었다. 전교생을 통틀어 몇 반 되지 않았지만 본인들이 지원했던만큼 한결 같은 향학열로 불타올랐다. 그 중심에는 과로로 쓰러지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랑으로 이바지한 스물다섯살의 총각선생님이 있었다. 난 그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 열심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눈길조차 마주칠 수 없었다. 검정고시준비를 위해 도시락 두 개씩 싸서 밤샘을 하여도 피곤한 줄 몰랐다. 세상의 전부만 같았던 그 시간들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안부가 궁금한 선생님은 찰나 같은 첫사랑이 아니었을까.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답시고 주변을 살뜰히 챙기지 못했던 젊은 시절이 이었다. 움켜쥐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그렇다고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만 더 헛헛해졌다. 세상을 원망했으며 이르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니 자꾸만 피폐해져 갔다.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하루하루 외줄타기 같은 삶을 살아냈다.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에서 한 치 앞을 모르고 치열하게 살았던 지난 시간들 모두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삶 또한 찰나에 불과한 것을. 행복은 자신이 가진 물질만큼 비례해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최근 인접한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강진에 이어 여진이 계속되는 중이다. 사람들에겐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못해 트라우마가 돼버렸다. 평화의 보금자리였던 집이 일순 두려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때만이 편안할 수 있었다. 하루라도 여진 없는 날이면 살얼음을 밟는 심경으로 안도의 한숨을 몰아쉰다. 큰 재난은 한순간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거나 괴멸시키고 만다. 백년도 살지 못하는 짧은 인생, 내 것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잠시 머무를 뿐이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연두 빛 이삭들이 군무를 이룬다. 살랑살랑 파르라니 꽃잎들이 비명처럼 떨어진다. 혼신의 힘으로 순간을 살아내고 떠나는 것들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