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감 / 이은정
감 / 이은정
나는 숲이 우거진 산 중턱에 산다. 수많은 나무, 민초와 같은 이름 없는 풀떼기가 우리 집의 담벼락이다. 대낮에도 마실 나오는 겂 없는 고라니와 밤이면 텃밭을 서리하러 내려오는 멧돼지가 이웃이다. 아침이면 새들의 신명나는 가락에 기상하고, 깊은 밤엔 먼 골에서 들리는 부엉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곤 한다. 현관문을 열면 지천에 푸르름이 그득한 마당 끄트머리에는 내가 이사 오기 전부터 여러 종류의 과실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본채와 가장 가까운 마당에는 감나무 세 그루가 있다. 산에 업혀 사는 자로서 부끄럽지만, 감이 열리기 전까지 그것이 감나무인지조차 나는 몰랐다. 워낙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무성하기도 했고 그 종류를 분별할 만큼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작년 가을, 웬 나무에 고운 빛깔의 동그란 것이 매달린 것을 보고 ‘아, 저것이 감나무였구나.’ 했다.
초록빛 산마루를 병풍처럼 두르고 살았던 여름의 색이 점점 희미해졌다. 감나무는 매끄럽고 선연한 주홍빛의 대봉감을 내달고 완벽한 가을을 선사할 모양이었다. 길었던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질수록 감은 옹골지게 무르익어 기막힌 색을 뿜었다. 여름 내내 온갖 벌레와 전쟁하고 잡초와 씨름하면서 산마을에 들어온 것이 후회될 무렵, 예쁜 감나무를 보자 생각이 역전되고 말았다.
사내 주먹보다 큰 대봉감 한 알을 땄다. 그 자리에서 껍질을 벗겨 후루룩 과육을 흡입했다. 오지 않은 가을을 품었는지 맛이 달고 깊었다. 욕심내어 따지는 않았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손이 닿는 감을 하나씩 따서 먹는 게 다였다. 이웃 사람들이 아까운 감을 왜 따지 않고 두냐고 했다. 감이 익으면 제때 따야 한다는 말도 했다. 손이 안 닿아서요, 라고 대답하면 장대를 사용해도 좋고 감망이나 감대도 흔한데 저 아까운 과일을 썩히느냐 했다. 그러면 나는 그만 웃어넘기고 말았다. 벙어리가 서방질을 해도 제 속이 있다하지 않던가. 내 속은 이랬다.
감나무에 달린 감은 누가 주인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했다. 따지 않은 감은 과연 사람이 먹지 못해 아까워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감을 딸 때마다 감나무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왜 자연의 열매를 따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많은 질문들이 감나무의 감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나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리 하려고 후미진 산동네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비단 치마 같은 고운 색의 감을 바라보면 마치 교감하듯 내 마음에도 화사한 감빛이 물드는 것 같았다. 그게 모두에게 행복이라 여겼다.
어느 날 무심코 감나무를 올려다보니 반쯤 잘려나간 감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더러는 꼭지만 남고 과육이 사라진 것도 있었다. 방긋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저녁으로 재잘재잘 후다닥거리며 집 안에 있는 내게 기척을 보내는 까치와 까마귀 녀석들 짓이 분명했다. 가끔은 주둥이가 긴 이름 모를 새와 손바닥만 한 참새들도 왕래하던 게 떠올랐다. 그 녀석들 짓일 수도 있겠다. 누구든 따져 무엇할 것인가. 그저 유랑아처럼 떠돌다 우리 집에 내려앉아 마른 목을 적시고 때론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면 반가운 일이다. 그렇게 감나무와 함께 평화로운 날들을 보내며 가을의 품에 들어서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감이 바닥으로 뭉텅뭉텅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것이야 자연의 이치 중 하나겠지만 설익은 것도 떨어지는 것을 보아하니 조기 낙과가 아닌가 의심되었다. 옆집 감나무는 아직 멀쩡한 걸 보니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듯했다. 마침 이웃어른을 만나게 되어 물었다. “그러니까 감을 제때 땄어야지!” 돌아온 답은 예상외였다. 요컨대, 적당할 때 열매를 솎아주어야 영양분이 분산되어 골고루 자란다는 설명이었다. 아뿔싸. 감수성만 가득한 이 무식쟁이 여자가 멀쩡한 감을 따지 않아 아직 여물지 않은 감이 살길을 잃었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와 제법 익은 감을 골고루 따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서 감 하나가 뚝 떨어져 나가면 나뭇가지는 홀가분하다는 듯 스프링처럼 가볍게 몸을 튕겼다. 나무가 예전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산발이 되어 서로를 짓누르던 나뭇가지도 전지가위로 쓱쓱 이발해 주었더니 뉘 집 나무인지 한낯이 난다.
나의 무지함이 낳은 비극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배려란 응당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데,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배려를 한 것이었다. 내 비관적 시선은 또 어떤가. 사람들이 감을 따라고 권할 때 떠오른 단어는 ‘오지랖’이었고, 감을 따지 않고 두는 내 마음 씀씀이는 기특할 따름이었다. 마치 그들은 자연을 훼손하는 나쁜 사람들이고, 나만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의 몽매함과 이기심이 자연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잘못된 배려는 안 하느니 못한 것이지 않던가.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그간 힘들었을 감나무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내 그 앞을 서성였다.
그날 이후로 아침마다 조금씩 감을 땄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하지 못한 날들이 떠올라 더욱 신경이 쓰였다. 이미 낙과한 것들은 산 방향으로 던져두었다. 서식지를 인간에게 빼앗기고 배곯을 야생짐승들이 잘 찾아 먹길 바라면서. 그것만은 배려다운 배려이길 바라면서.
올해 삼복더위는 산도 숲도 이기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한 여름 땡볕과의 치열한 전쟁에 패했는지 숲은 우리 집 마당에 냉기를 뿜어주지 못했고 나무들은 혓바닥을 늘어뜨린 강아지처럼 지쳐 보였다. 살아있는 생명은 하나같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감나무에 눈깔사탕만 한 초록 알이 맺힌 걸 보았다. 소뿔도 녹는다는 복더위에 무에 급해서 벌써 새끼를 품었을까 싶은 염려와 곧 가을이 오리라는 기대가 한데 모여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한 알 입에 넣으면 입안 가득 새콤함이 퍼질 것 같은 올망졸망한 새끼 감들. 이 풋내나는 녀석들이 잘 자라 독립할 때가 되면 시원하고 청명한 가을이 올 것이다. 그나저나 어린 것들이 무더위에 얼마나 목이 마를까. 올해는 제대로 된 배려를 해 볼 작정으로 수돗가에서 호스를 끌어왔다. 손잡이를 움켜쥐자 시원한 물줄기가 감나무에 쏟아졌다. 까르르. 배내옷을 입고 있는 풋감들의 웃음소리가 더위에 지친 산기슭에 기분 좋게 울려 퍼진다. 바람직한 배려와 공생, 이제서야 설핏 감(感)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