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검정 / 송마나
검정 / 송마나
새벽 4시, 하루가 열리는 시간이다. 나는 아직도 지난밤의 어둠 속에 앉아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육체는 점점 잠에서 멀어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매일 밤 하데스로 내려가야 하는 숙명의 영장靈長.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의 이미지로 단장하고, 새벽닭이 울면 두 눈은 빛을 향해 게슴츠레 열리고, 끊어지지 않는 욕망은 뱀처럼 꿈틀꿈틀 기어오른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오지 않는 잠을 나무라지 말라며 무언의 압박을 하는 듯하다. 그중에서도 몸집이 커서 책장 안에 세로로 들어서지 못하고 가로로 누워 있는 <이집트 사자死者의 서THE EGYPTIAN BOOK OF THE DEAD>가 강한 눈길을 보낸다. 그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표지가 핏빛으로 번들거리는 책을 펼친다. 검은색 재칼 머리 아비누스가 그림 한가운데서 죽은 자의 영혼을 저울로 달고 있다. 깊은 밤에 아비누스의 검은 머리가 섬찟하다.
동물들은 검은색을 무서워하지 않는데 인간은 왜 검은색을 무서워할까. 인간은 검은 고양이를 보면 재수 없고, 검은 까마귀를 보면 불길하다고 생각한다. 어디 그뿐이랴. 검은색을 불행, 공포, 증오, 죄, 악마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치부하고 급기야 죽음의 색이라고 단정 짓는다.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를 흑사병黑死炳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단순히 환자의 팔다리가 검게 변하는 괴저만이 아니라 그 병에 걸리면 환자 대부분이 죽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인식한 인간만이 동물과 달리 죽음을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검은색은 색이 아니다."라고 했다. 검은색은 빛의 파장에 따라 나뉘는 색깔 스펙트럼 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색이 아니라는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작품 <살바토르 문디>에서는 까만 어둠 속에서 부활한 예수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검은색은 빈 공간일까? 아니면 어떤 물질로 가득 찬 상태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 깨달음은 무지일 것이다. 내가 잠을 잊고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것은 죽음을 피해 숨는 것이 아니라 죽음 속으로 숨어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득 검은색은 신의 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원전 1250년경부터 전해 내려온 <이집트 사자의 서>는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190장의 주문으로 구성된 파피루스다. 긍정의 서기였던 아니는 죽은 후에 1212 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장을 떼어 심판을 받아야 한다. 이집트인은 심장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법정 중앙에는 양심을 계량하는 저울이 놓여 있고, 자칼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그려진 아비누스가 한쪽에 타조 깃털을, 다른 쪽에는 아니 심장을 올려놓는다. 저울추가 수평을 이루면 아니는 무죄가 되어 그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다.
이 법정에서 죽음을 심판하는 아비누스만이 여러 신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검은색으로 묘사되었다. 왜 아비누스는 자칼 형상의 검은 탈을 쓰고 있을까? 자칼은 무서운 동물이지만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아비누스가 겉보기에는 자칼처럼 무섭지만 그의 내면은 죽은 자의 영혼을 다시 부활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처럼 공포의 존재이지만, 정작 죽은 자를 산 자로 이끌어 가는 것을 주관한다.
검정색의 표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속에는 어떤 무한한 비밀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 순간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눈의 홍채가 열리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검정색은 불투명성과 영원성을 지닌 야누스의 두 얼굴을 닮았다. 죽음과 탄생을 함께 빚어내는 신처럼.
죽음은 삶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밤과 낮, 하늘과 땅, 남과 여, 이런 우주론적인 낱말들은 '쌍'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해가 지면 밤이 스며들고 밤이 이울면 동이 튼다. 삶의 가장자리에 죽음이 있고 죽음의 울 밑에서 생명이 터져 나온다.
우리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권리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에서부터 생성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더는 명료한 의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퇴화된 삶을 의사의 도움으로 근근이 이어가기에 이의를 제기했나 보다. 의식을 잃지 않는 자유로운 죽음은 삶을 획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악령>의 키릴로프처럼 새롭고 가혹한 자유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의적인 죽음을 택할 필요는 없으리라.
밤새도록 하는 독서는 나를 아득한 세계로 이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가족과 사회에서 멀어지고, 시간과 공간마저 잊어버린다. 책 속에 완전히 몰입하면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빠져든다. 그런데 책 속의 세계에서는 죽어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가 검은 문자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집트 사자의 서>의 아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