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꽃무릇 / 정목일
꽃무릇 / 정목일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의 축제에 갔다. 꽃을 보는 순간, 안으로 끓어오르는 눈물이 샘솟음을 느꼈다. 처음 보는 꽃, 아름다워서 더 애처로운 모습이라 눈을 뗄 수 없었다. 풀섶에 묻혀 알게 모르게 피고 지는 들꽃이 아니었다.
구월 중순, 광주에 간 길에 문우들의 안내로 찾아간 곳이 ‘꽃무릇 축제’가 열린다는 함평군 해보면이었다. 고찰(古刹) 용천사가 있는 주변의 야산과 자그마한 호수 주변에, 잎도 없이 무더기로 핀 꽃무릇들을 본다. 산비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우리 꽃인 줄 알았으나, 일본에서 건너온 꽃이라 했다. 용천사 주변은 국내 최대의 꽃무릇 자생 군락지로서, ‘꽃무릇 공원’으로 정하여 꽃필 무렵인 9~10월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여름에 잎이 모두 말라죽고 난 후, 가을에 꽃이 피므로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다고 하여 ‘상사화’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꽃술이 꽃잎보다 훨씬 길어서 거의 두 배 정도나 된다. 상사화의 일종으로 꽃술이 꽃잎을 에워싸 보호하고 있어서 범접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용천사 주변은 무더기로 피어난 꽃무릇들로 별유천지(別有天地)를 만들어 놓고 있다. 야산에 피어난 꽃무릇을 보며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 기분이 황홀하다.
볼수록 신기한 꽃이다. 꽃이란 아름다움의 절정이고, 나비나 바람의 힘을 빌어 꽃가루 수정을 위한 일념에서 꽃 피울 날을 고대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꽃무릇만은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애절함 속에, 향기마저 없어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종내는 열매마저도 얻지 못하는 꽃이다.
연두색 꽃대 하나를 온 정성을 모아 치켜세운 끝에, 잎도 없이 한 송이 꽃을 피워내는 꽃무릇은 눈부시고 장엄하다. 순결한 소망을 향해 타오르는 촛불 같고, 부처 앞에 합장하는 수도자의 자태 같다. 고독 속에 묻혀 저토록 붉은 혼불 같은 꽃을 피워 놓았는가. 임과의 만남과 행복도 멀리 하고, 종내 열매 맺는 일조차 버림으로써 일체의 욕망을 초월하였다. 붉은 꽃잎과 긴 꽃술은 섬세하고 정교하기 그지없고, 순교자의 의연한 자태를 지녔다.
향기가 없는 꽃, 열매를 맺지 않는 꽃이란 진정 꽃이랄 수 있을까. 꽃무릇은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꽃 자체이고자 한 것이 아닐까. 나비와 향기와 열매를 바라는 꽃의 일생이 아니다. 오로지 한 송이 깨달음의 꽃을 피우는 데 집중력을 기울여 온 모습이 아닌가. 여느 꽃에서도 느낄 수 없는 선각자의 깨달음과도 같은 엄숙함과 영혼의 눈빛을 느낀다.
꽃무릇은 향기가 없지만 특이한 모습만으로도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고창 선운사와 함평 용천사 등 전라도 특정 지역에만 군락을 이뤄 피는 까닭에 희귀성이 있다. 꽃의 자태가 준수하고 진귀하다. 꽃에 대한 관념의 영역을 넓혀주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오래 동안 사로잡으면 감동과 여운을 주는 전설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옛날 선운사에 젊고 잘 생긴 스님이 새로 왔다. 절에 불공을 드리러 온 동네의 한 아가씨가 이 스님에 반하여 가슴앓이를 하다가 그만 상사병이 나서 죽었다. 아가씨가 묻힌 묘에서 이 꽃이 피어났다 하여, 상사화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꽃무릇은 다른 말로 석산(石蒜)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자풀이로는 ‘돌마늘’로 돌이 많은 곳의 틈새에서 무리를 지어 나오며, 뿌리는 마늘 모양을 지닌 여러해살이 풀이다. ‘석산’이란 이름보다는 북한에서도 쓰는 ‘꽃무릇’‘꽃무릇’ 이란 이름이 더 어울린다.
솔밭 밑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꽃무릇들은 참선 수도하는 스님 같이 초연하다. 붉은 꽃잎이 연약한 듯하면서도 강인해 보이고, 손댈 수 없는 위엄이 있다. 벌· 나비가 함부로 넘나들도록 허용하는 꽃이 아니라, 오로지 깨달음의 끝에서 피어난 꽃이다. 이 때문에 인가(人家)가 아닌 사찰 주변에 심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
꽃무릇을 보면서 호숫가 음식점에 앉아서 문우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운치가 있다.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일생의 집중력을 기울여 깨달음의 꽃 한 송이씩을 피운 꽃무릇들, 구월의 야산을 붉게 물들이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의 촛불들을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다.
꽃무릇을 보면서 막걸리 때문인지, 빗방울이 떨어져서인지 몰라도 뜨거운 눈물이 치켜 오르는 것을 느낀다. 전라도 산수와 막걸리에 취하고, 꽃무릇에 그만 정신을 팔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