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불끄기 / 백승분

cabin1212 2022. 1. 7. 05:47

불끄기 / 백승분

 

 

 

산길을 걷는다. 갑자기 노랫소리가 요란하다. 앞서가는 할아버지가 녹음기 볼륨을 높인 것이다. 산의 소리가 묻힌다. 혼자 들으면 좋겠구만. 흥에 취해 소리가 점점 커진다. 뒤따라 걷던 할머니가 혀를 차며 입을 삐죽인다.

영감 산도 아니면서 그렇게 크게 틀고 다니면 어떻게 하노. 산에 왔으면 새소리 물소리나 듣지 그걸 왜 여기까지 달고 왔는고?”

중얼거리며 녹음기를 빼앗을 태세다. 다른 사람 보기 창피해 죽겠다고 말려도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화를 낸다.

내 것 가지고 내가 듣는데 누가 무슨 소리를 하노. 내 산도 아니지만 제 산도 아니잖아. 별난 할마시랑 절대 같이 못 다니겠네. 집에서도 사람을 가만두지 않더니 왜 산에서까지 와서 달달 볶노.”

불퉁거린다. 겉모습은 푼더분하건만 속은 그렇지 않나 보다.

이젠 녹음기 소리보다 두 노인네 싸움 소리가 더 크다. 서로 자기주장만 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롭다. 안 그래도 더운 날씨에 두 사람 불길이 더해져 체감온도가 올라간다.

자기밖에 모르는 영감탱이. 아무리 애써도 더는 못 봐 주겠다.”

할머니 얼굴이 노래졌다. 할아버지도 지지 않는다.

누가 먼저 산에 가자고 했노. 따라왔으면 고마워할 일이지 왜 시비를 걸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할머니가 가던 길을 획 돌아선다. 화가 나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딱장대 같은 영감. 인제 진짜로 같이 안 살 끼다. 오늘은 참나 봐라. 이날 이때까지 해준 게 뭐 있다고. 툭하면 소리나 질러 댔지. 누가 겁낼까 봐.”

말이라도 오지게 해야지 마음이 풀리려나. 휘청거리며 내려가는 할머니를 보더니 할아버지도 씩씩대며 등을 보이고 돌아서 산으로 올라간다. 찬물 한 바지면 웃불이 꺼질 텐데 두 사람 다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음 같아선 대신해주고 싶다. 할아버지 할 일은 돌아서 가는 할머니를 붙잡고 녹음기 소리를 낮추는 것이고, 할머니는 노래를 이어폰으로 듣자고 할아버지를 구슬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구경꾼에게 보이는 해결책이 본인한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저러다 활활 타 재가 될까 두렵다. 치솟는 불길에 옆 사람까지 데이겠다. 그래 봐야 제 살 깎아 먹기지. 아닐 말로 갈라 선들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방도를 찾지 못하고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비다. 빗방울이 하늘에서 자갈을 쏟아붓는 듯 떨어진다. 태풍이 서성거리며 비를 잔뜩 머금고 있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내릴 줄 몰랐다. 놀란 마음이 더 놀란 건 두 노인의 행동이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리고 가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향해 돌아서 재바르게 좇아간다. 할아버지가 배낭에서 작은 우산을 꺼내 할머니를 끌어당기자 못 이기는 척 몸을 붙인다. 할머니가 손수건으로 할아버지 얼굴을 닦아주며 젖을세라 어깨를 서로 감싼다. 오도 가도 못한 표정이 머쓱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타오르던 불기가 사그라졌으니.

불씨를 싹 없애겠다는 것인가. 바람까지 합친 빗줄기가 부랑스럽다. 녹음기 소리도 싸움 소리도 빗소리에 묻힌다. 두 사람의 고집을 무참히 깨어 버린다. 가지를 훑고 후드득후드득 나뭇잎을 내리치며 바닥에 사정없이 꽂힌다. 막힌 통로가 뚫리는 듯 후련하다.

저 연세가 되도록 고집불통인 할아버지도 어지간하고 변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붙들고 저 세월까지 싸우는 할머니도 딱해서 하늘이 나선 것인가. 다급하게 불을 끄느라 힘들었나 보다. 숨을 고르느라 빗줄기가 가늘어진다. 남의 마음 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비가 장하다. 예사 비가 아닌지라 눅눅한 몸으로 산을 오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