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맨발로 / 임우희
맨발로 / 임우희
봄눈 내린 날이었다. 앞산 자락길을 오르다가 중턱쯤에서 그를 보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그는 맨발로 걷고 있었다. 발이 시리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불편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내려오는 길에 보았더니 시리지도 않은지 더러워진 발을 헹구고 있었다. 여전히 힘든 내색은 없었다. 그는 나와 같은 산악회원이었다. 건강을 위해 맨발걷기를 한다고 했다. 평소 맨발 걷기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락 길에서 맨발의 그를 본 후 마음이 달라졌다. 나도 살짝 맨발로 걸어 보았다. 힘들면 그만둘 생각이었다. 발이 조금 따끔거렸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며칠 지난 뒤 발바닥을 보니 작은 물집이 굵은 발가락 밑에 소복이 생겨있었다. 부작용이 생길까 걱정은 되었지만 시작한 김에 조금 더 걸어 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발바닥을 먼저 살펴보았다. 오종종 모여 있던 물집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번에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을 1시간 넘게 걸어 보았다. 거뜬하게 걸을 수 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확신이 생겼다. 몸도 가볍고 잠도 훨씬 쉽게 들 수 있었다.
유년시절에 나는 허약해서 보약을 달고 살았다. 8살 때 다리를 절룩거려서 부모님 애를 태우기도 했다.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어른들에게 몸을 꼭 잡힌 채 대침을 맞은 적도 있다. 무릎 사이에서 노란 물이 빠져 나오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아버지와 마을 뒷산을 맨발로 걸었다. 아버지는 다리에 근육이 붙으면 괜찮아진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믿음이 갔다. 어느 날부터 거뜬히 걸을 수 있었다. 고향 마을 뒤에는 조문국시대의 왕릉이 많다. 조금 더 올라가면 목화를 붓 대롱에 넣어 와서 우리나라에 전파한 문익점 선생 기념비석도 있다. 붉은 황토로 뒤덮인 길섶에는 이름 모를 풀꽃이 지천이었다. 아버지는 풀꽃 이름과 꽃 이름들을 들려주셨다. 아버지 덕분에 맨발로 걷는 일이 힘들거나 지겹지 않았다. 그 시절 젊고 자상했던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매일 3만보를 걷는데 성인병과 자폐아가 없다고 한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걷는 걸 좋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같이 걸으면서 대화했고, 칸트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걸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대문호 괴테와 철학자 헤겔, 야스퍼스도 산책을 많이 했다. 아인슈타인도 연구소 근처를 맨발로 걷다가 ‘상대성이론’을 떠올렸다고 한다.
나는 건강에 문제가 생긴 후 부터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해 보았다. 여러 차례의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허리는 비가 오거나 피곤하면 무거운 돌덩이를 달아둔 것처럼 아프고, 잠 못 이루는 날은 셀 수도 없다. 왼쪽 귀는 밤낮 없이 이명에 시달린다. 여러 차례 검사도 받고 유명하다는 곳은 두루 찾아가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가는 곳 마다 처방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효과는 보지 못했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잘 다독거려 끌고 가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나는 더 늦기 전에 자연의 순리에 내 몸을 맡겨보고자 한다. 문명이 있기 전 태곳적 인간으로 돌아가 보고 싶다. 기본에 충실할 때 건강도 있으리라 믿는다. 꽃도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아름답고, 새소리도 산 속에서 더 맑게 들린다. 오늘도 나는 맨발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