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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길 위에서 길을 묻다 / 우종율

cabin1212 2022. 3. 21. 05:45

길 위에서 길을 묻다 / 우종율

 

 

 

길 위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초췌한 모습, 남루한 입성, 겨우 지탱하는 홑 자전거에 의지해 있었다. 거기에 주렁주렁 달린 가위, 칼, 냄비, 짐칸에 묶인 불룩한 내용물, 걸음걸이마다 과거를 지워나가는 듯했다. 자루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묻지 않았다. 마른 논바닥이 쩍쩍 갈라진 것 같은 그의 입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말라버린 감꼭지를 화면에 담으려고 겨울나무 가지에 초점을 잡고 있었다. 봄소식을 나무에게 존재의 의미를 잊지 말라고 툭툭 발로 차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등 뒤에서 희미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들 왕래가 없는 겨울 들판, 어중간한 위치였다. 도저히 그와 같은 사람과 만날 장소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를 만난 건 어쩜 어제 저녁 꿈속에서 만난 얼굴을 알 수 없던 지인과도 같았다. 금세 나타났다가 묘한 미소만 던지고 사라져간 사람

 

‘ 누굴까? ’

상수리나무 아래서 예고 없이 떨어지는 도토리처럼 ‘ 툭 ’, 말을 건네 왔다.

“ 대전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

“ …… ”

‘ 아니, 이 사람이 길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 아닌가. ’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행색에 비해 눈빛은 빛났다. 어떤 목적을 가진 이가 틀림없었다.

 

지난밤 꿈속에 만난 알 수 없는 지인, 혹 이 남자 현신이 아닐까. 남자를 내 틀 안으로 잠시 끌어들이고 싶었다. 내 눈동자가 중요했다. 특히 조심해야 할 건 상대방 자존심을 건드리면 그는 곧 벗어날 것이다. 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입견을 먼저 정한 후 서서히 짜 맞추기에 들어갔다. 잠시 갓길로 남자를 피신시켰다. ( # 그 시간, 여기를 통과하는 자동차는 거의 없었음. 더군다나 농사철이 아닌지라 지나가는 경운기조차도 없는, 시골 농로보다 조금 넓은 도로였음. )

 

우선 나의 선입견은,

남자 나이 : 60대 후반

전직 : 중소기업 대표, 대기업 중견 간부

행보 : 자신을 되찾기 위해 자학하는 의미로 전국 일주

사는 곳 : 대도시 변두리 부근 소형 아파트 혹은 고시원

기타 : 파산 혹은 실직,

여기까지 가닥을 잡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그 속내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상체를 살짝 구부리고 있었다. 직립이 어려운 듯, 흡사 구부러진 철사 같았다.

 

본격적인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건 신문 기사나 방송 매체가 아닌 길 위의 짧은 시놉시스일 뿐,

“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

“ 빵 한 개로 3일을 버티기도 해요”

그에게서 어떤 결론도 얻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그에게 가혹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삐뚜름히 서서 적극성을 보였다. 흡사 다음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했다.

“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

“ 경남 합천에서요 ”

“ 출발은요? ”

“ 서울 광화문에서 ”

“ 이 자전거로 줄곧 다녔습니까? ”

“ 이 건 내 평생지기입니다 ”

“ 이렇게 낡았는데 먼 길을 동행했단 말입니까? ”

“ 모두 다 떠나갔지만, 이 친구만은 내 옆자리를 지켰어요.”

 

선입견과 어느 정도 짝 맞추기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그가 움직이는 지도 선상의 중간쯤 위치, 하지만 너무 진부한 이야기가 아닌가. 감성을 자극하는 건 어느 매체에나 나오는 일이다. 뭔가 다른 것이 있어야 어젯밤 꿈과 남자의 현실을 결부시킬 수 있을 텐데. 아픈 사람을 건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일방적인 내 생각대로 진행한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는 그저 평범한 스토리일 뿐이다. 몇 번이나 맘속으로 도리질을 하다가 이어나갔다.

 

“ 합천까지 먼 거리를 왜 가셨나요? ”

“ 해인사를 언젠가는 혼자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어요. ”

“ 왜, 해인사였죠? ”

“ 거긴 내 젊은 흔적이 있거든요. ”

“ 젊음요? ”

“ 내 가족, 청춘, 황금기, 명예 등등 요. ”

“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데요? ”

“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요 ”

 

아뿔싸, 너무 깊이 들어왔구나. 자칫 입장이 역전될 것 같았다.

“ 어디서 자며 어떻게 갈 거냐, 또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을 거죠? ”

나는 타성에 젖은 일방적인 인터뷰를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길이 있잖아요, 여태껏 걸어왔고 또 걸을 길 요. 그 길 위에서 열심히 걸었는데 잠시 배반당했어요. 그래서 그 길의 항변을 듣고 싶어 이렇게 길 위에 서서 걷고 있어요. 아마 목적지에 닿으면 누군가 또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겠죠. 그때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요. 아마 여기서 대전까진 200킬로미터쯤 될걸요. 여태껏 추위에 견디며 길을 걸었는데 설마 길 위에 쓰러지기야 하겠어요. 길을 걸어보니 길은 속이지 않아요. ”

고목에서 안간힘 쓰며 새싹을 뿜어 올리는 힘처럼 타오르는 남자의 눈매, 겨울나무에 억지로 봄소식 알리려 했던 내 선입견, 나는 다시 썼다.

 

‘비어 있는 길은 말이 없다. 누군가 차지하고 있을 때 비로소 길이 된다. 길건 짧건 그건 내용 면이지 형식은 아니다. 그 길을 걸을 때, 존재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길은 길에 의해 존재한다. 그 길 위에서 숱한 이야기가 되어 본연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사람살이도 길에서 시작된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는 것도 노년에 수를 다한 이들도 천천히 길 위에서 마감한다. 곧거나 휘어지거나 길은 끝이 없다. 인생의 도돌이표가 되어 어느새 자신 앞에 도사리고 있는 길, 그 길 위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고 출발한다.’

 

국밥집에라도 들렀다 가라고 내밀었던 지폐 몇 장,

전달되지 않고 푸른 수의처럼 길 위에서 팔랑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