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맹랑한 손님 / 최재운
맹랑한 손님 / 최재운
진눈깨비가 섞인 가랑비가 한차례 훑고 지나간 후의 화창한 오후였다. 점심 식사 후 계절답지 않게 따사로운 햇살을 등 뒤로 느끼면서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공문이며 각종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중이었다. 뭔가 인기척 비슷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책상 바로 곁에 불과 두어 뼘 떨어진 곳에 자그만 다람쥐 한 마리가 앉아있지 않는가! 실내 공기를 바꾸려고 출입문과 창문을 잠시 열어두었더니 그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 찾아든 것이다.
삭막하고 긴 겨울을 맞아 이 시간 숲속을 두루 다니면서 양식을 준비하기에도 바쁠 텐데, 무슨 곡절로 삭막하기만 한 사무실에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랴. 기왕 들어온 손님이니 잠시 숨을 돌릴 겸 서류에서 눈을 떼고 이 녀석의 행동거지를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 놀라서 달아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자세를 전혀 바꾸지 않은 채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녀석을 주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녀석이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빤히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장난기와 더불어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도대체 얼마나 견디나 보자’ 하고 한참을 빤히 마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희한한 눈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무실 문밖 복도에 누군가가 지나가며 내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녀석이 먼저 자세를 풀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녀석은 책상이며, 응접용 소파, 책장 사이를 분주히 왔다 갔다 하며 출구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든가. 한참 동안 온 방 안을 헤매고 다녔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뻔한 데도 그 녀석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사람의 시선에 맞추어 설계하고 만들어둔 각종 시설물이 그의 눈에는 좀처럼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옆으로 나가면 문이 환하게 열려 있는데도 엉뚱한 곳으로 돌진해가서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돌아오기를 거듭했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우습고 딱했지만 그에게는 생사가 걸린 중대사가 아니겠는가.
그가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출입문을 찾아 나갈 때까지 얼어붙은 듯 가만히 앉아있었다. 혹시 어설픈 내 행동이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미 품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작은 체구의 다람쥐였다. 연한 황갈색 바탕에 까만 줄무늬가 선명한 앙증맞고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나간 후 이 방 저 방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다람쥐를 봤다거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행한 일이다. 지금쯤 원래의 생활 터전으로 무사히 돌아가서 그 가족과 함께 능성이며 골짜기를 마음껏 누비고 있으리라.
다람쥐는 집쥐와는 달리 생김새가 날렵하고 세련되어 혐오감을 일으키지 않아서 좋다. 만약 그때 집쥐가 사무실에 나타났더라면 어찌했을까?? 십중팔구 크게 놀라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을 것이다. 출입문을 닫아걸고 큰 소리로 고함을 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쥐잡기 소동이라도 한차례 벌였을 것이다. 쥐도 나를 쳐다보기는커녕 불이나캐 피해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아 달아났을 것이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다. 집쥐가 되었던 다람쥐가 되었던 무슨 상관인가.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선입관과 편견이 문제인 것이다. 집쥐가 사람들 주위를 맴돌며 곡식을 훔쳐 가고 몹쓸 질병을 옮기는 등 얄미운 짓을 많이 하긴 한다. 그것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인 것을 어찌하랴. 내게 직접적인 피해나 지장을 준 적도 없는데 무조건 경원하고 살기를 품고 눈을 부라리는 것은 가당치 않다.
오늘날 우리는 이웃을 믿지 못해서 이중삼중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 갇혀 산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희한하고 무시무시한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자신을 잡아 가둘지도 모르는 인간에 대해 털끝만큼의 두려움도 없이 과감하게 맞서던 그 녀석이 오히려 가상하고 기특하다. 설사 길을 잃어 본의 아니게 내 방을 찾았더라도 좋다. 상대방의 진심보다는 숨은 의도를 읽으려고 애쓰고, 만사를 저울 위에 올려놓고 손익부터 따지는 인간을 멀리하지 않고 찾아준 것만으로도 대견하지 않은가..
엄동을 맞아 간혹 눈발이 날리기도 하는 팔공산에는 색이 변한 나뭇잎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간이 초래한 자연 질서 교란과 환경파괴는 기후조차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제발 사납지 않고 포근한 동장군이 찾아와서 그때 그 다람쥐를 비롯한 산속의 모든 동물 가족들이 큰 어려움 없이 이 겨울을 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터무니없는 욕심인 줄 잘 알지만, 내년 이맘때 파계봉 자락 어디에선가 건강하게 잘 자란 그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