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반환점 / 조병렬
반환점 / 조병렬
인생은 예행연습이 없는 마라톤이라고 한다. 한 발자국도 다른 사람이 대신 뛰어 줄 수 없는 것이 마라톤인 것처럼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삶의 무게가 가볍든 무겁든 자기 힘으로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말이 또 있을까.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절절히 내 가슴에 새겨두고 곱씹어야 했던 두려움을 담은 화두였다.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이 별로 없는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나는 항상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혹 암담한 미래가 어둠처럼 밀려드는 상상은 한없는 고통이요 외로움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마라톤 동호회에서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 고성, 진주, 경주 등 여러 대회에 참가해 보았으나 달릴 때마다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들과는 달리 달릴 때마다 기록이 늦어지는 희한스러운 기록도 갖고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가는 탓도 있겠으나 더 빨리 나아가려는 자신을 제어하는 내 마음의 속도계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은 수행자의 고행과도 다를 바 없다. 언제나 처음 출발할 때에는 몸도 마음도 가벼우나 가다 보면 힘겨운 오르막도 있고 눈보라가 몰려올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반환점을 돌고 나면 점차 숨은 가빠오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때로는 다리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도 따르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멈출 수도 없고 남의 어깨에 기댈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은 고행(苦行)이면서 또 다른 고행(孤行)이다.
고행을 통한 구도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우며, 삶의 숭고한 본질에 관한 해답을 얻을 수도 있다. 영화 <만다라>에 나오는 두 스님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눈길을 걸으며 해탈을 추구하듯이 마라톤도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의 답을 구하는 수행 과정이다.
반환점. 인생이든 마라톤이든 반환점 이후가 중요하다. 힘든 만큼 두려움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어느덧 내 인생도 반환점을 지났다. 지금까지 내가 달려온 길은 대체로 평범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혀 오르막이 없었던 건 아니나 주저앉을 정도로 힘든 길은 아니었고, 비바람이 몰려오기도 했으나 흙탕물에 휩쓸려 허우적거리지는 않았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치고 보면 그 정도야 평탄한 길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가 두려워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용기는 갈수록 줄어드는데 디디고 건너가야 할 미지의 세계가 피할 수 없는 외나무다리처럼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이든 지난 일들은 만용(蠻勇)으로라도 잊고 살 수 있으나 앞길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끝마무리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달리다 보면 마지막 남은 짧은 시간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통감할 때가 많다. 그 자리에 그만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더러 생겨나지만, 달려온 시간이 아깝고 소중하기도 하려니와 쉽사리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고귀한 인생임을 알기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 일요일, ‘대구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카운트다운의 출발 신호와 함께 모두 신나게 달렸다. 나는 무리 속에 휩쓸려 달리면서 애초부터 기록에 대한 욕심은 버리기로 했다. 끝까지 완주할 수만 있다면 만족하다고 생각했다.
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저절로 깨닫게 된 것 중의 하나가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사실이다. 이젠 망망대해를 향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마냥 조심스럽게 달려가고 싶을 뿐이다. 반환점이 등 뒤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으니 어떤 길이 내 앞에 펼쳐지든 그 길 따라 흘러가야 하리라. 그것이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