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그 말들 / 정혜옥
그 말들 / 정혜옥
슬쩍 마당을 내다본다. 슬쩍 슬픔이 지나갔다. 슬쩍 대문을 바라본다. 더 큰 슬픔이 지나갔다. 바람이 부는가. 대문 간에 놓인 신문이 펄럭인다. 그가 신문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오면 신문의 냄새와 그의 말이 집안에 퍼지고 우리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현관문을 열고 층계를 내려선다. 천리향 잎을 만져보다가 황매화 가지를 흔들어 보다가하며 대문으로 갔다. 문을 연다. 문안에도 문밖에도 사람은 없다. 풀을 꼭꼭 밟고 바위 곁으로 갔다. 바위 위에 앉는다. 비어있는 바위, 비어있는 마당. 더 큰 아픔이 지나갔다.
오십 년 전, 집을 지을 때부터 바위는 거기 있었다. 인부들이 영차영차 하며 들고 와 그곳에 놓았었다. 서쪽 담 밑, 마당이 훤히 보이는 자리이다. 그날, 바위를 향해 제일 먼저 다가간 사람은 남편이었다. 바위에 앉아 그가 한 말, “참 편안하다.” 이었다. 그날부터 바위는 남편의 자리가 되었다. 그는 바위에 앉고 아이들과 나는 풀밭에 앉고 그렇게 마당의 한 부분처럼 살아왔었다.
그가 퇴직을 하였다.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생각” 하고 말하였지만 또 서재에 파묻혔지만 서재의 문을 닫을 때마다 문의 소리가 크게 들리었다. 그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었고 말을 하며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불렀다.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았다.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지식 사회학 책이었다. 그 두꺼운 책을 왜 들고 있었을까. 책속의 내용을 말하였다. 강의를 하듯이 열성적으로 말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저 지식들을 어찌할꼬. 가슴 속 말들을 어찌 할꼬.’ 했었다.
타국으로 떠났다. 퇴직 후의 공백, 그 적적함을 견디기 위함인 듯 “오래 걸릴 것이다.” 하였다. 일 년 동안, 유학시절의 경험들을 그리워하며 비엔나의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고 서양 친구들을 만나 웃고 떠들기도 하였다.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기도 하였다. 그 비틀거림이 경직되었던 삶에서 풀려나는 자유로움 같았다. 봄에 떠났던 우리는 겨울에 돌아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그가 먼저 다가간 곳이 마당에 있는 바위였다. 바위 위에 앉았다. 그는 비로소 집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 온 듯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긋이 바라봄의 눈길에는 인연의 애잔함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후, 그는 “또 가자” 하였고 우리는 또 갔다.
어느 저녁, 야간비행기를 보고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세상을 참 많이 돌아 다녔지.” 하였다. “또 가자.”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당의 나무들에게 말을 건네었다. “아, 단풍나무” “아, 콩배나무” “아, 산딸나무.” 꽃을 향해서는 “아, 노란 꽃” “아, 작은 꽃”하며 담백한 표현을 하였다. 말의 어휘들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하루는, 그가 보리수나무 옆에 서 있었다. 보리수 노래 한 가락을 흥얼거리더니 “비엔나에서 갖고 온 나무이다.” 하였다. 외국에서 나무를 갖고 오다니,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때 나는 그의 머리 안의 기억들이 헝클어지고 있음을 알았고 두려운 시간이 곁에 다가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하지만 나는 그를 찾아 방에도 가고 마당에도 가고 대문 밖에도 간다. 그의 말을 찾아 그가 심은 은목서와 옛 집에서 데리고 온 수수꽃다리 곁에도 간다. 굴밤나무 옆에도 간다, 굴밤나무는 가야산 북벽에서 갖고 온 나무이다. 그날 우리는 굴밤나무 앞에서 싸움을 하였다. 나는 굴밤나무를 도토리나무라 했고 남편은 상수리나무라고 했었다. 그날 나는 왜 그렇게 그를 이기려고 했던 것일까. 싸움 때문에 험한 고령재를 넘을 때도, 낙동강을 건너올 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굴밤나무를 땅에 심을 때 비로소 말을 하였다. 나는 삽과 괭이를 웃으며 갖다 주었고 그는 굴밤나무가 들어설 자리를 깊고 넓게 팠었다. “오래 함께 살자.” 하며 흙을 꼭꼭 밟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