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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아버지의 장보기 / 최선화

cabin1212 2022. 7. 14. 06:15

아버지의 장보기 / 최선화

 

 

재래 시장을 찾았다. 몇 걸음만 나서면 대형 마트가 있지만 정겨움 때문에 일부러 장을 찾는다. 좌판 위가 제 방인 양 누워 비늘을 번득이는 조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전화기 너머의 친정 어머니는 숨을 몰아쉬면서 아버지의 안부까지 전해 주었다. 아버지는 딸 셋에 하나 있던 아들의 제사상을 위해 장에 가셨다고 했다.

손아래 하나 있던 남동생은 아흔을 넘긴 조모보다 먼저 이 세상 여행을 끝냈다. 어린 조카, 새 생명을 보듬아 안고 있던 올케까지 남겨 둔 채 서둘러 떠났다. 가족들의 가슴에 큰 못 하나씩 박아 놓은 채 돌무덤 속에 누워 있는 세월이 십여 년이나 지났다. 그 일 이후 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의 금기사항이 되어 있다. 누가 말린 적도 없고 하지 말라는 사람 없지만 불문율에 가깝다. 그 아들을 위한 장보기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몫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동생을 향하여 '남은 이들의 고통을 아느냐?'고 공중에다 대고 물을 때도 있었다.

장은 기일이 임박해서 보면 갈무리에 속 끓이지 않아도 될 일이건만 해마다 반복되는 가족들의 성화에도 아버지는 매번 서두르신다. “가슴에 묻힌 자식 뭐 좋다고 내가 정성을 들일까?”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듬직하게 생긴 생선들과 갖가지 제물들을 장만하는 데 늘 잰걸음이시다.

넓적한 뱃가죽을 땅바닥에 붙인 가자미가 제일 먼저 장바구니에 담겼을 것이다. 밀가루 옷을 입혀 아들이 좋아하는 가자미 전을 부치기 위해서다. 일찌감치 구입해 와서 군둥내가 나지 않도록 말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하루 파리 떼랑 날씨와의 전쟁이다. 다른 생선에 비하여 먹을 것이 없고 상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복잡하지만 말릴 수가 없다.

어시장의 이곳저곳을 뒤져 조기도 장바구니에 담는다. 비늘을 제거한 후 소금 간을 해서는 다른 생선들과 함께 찜 솥을 거친 뒤 목기 위에 가지런하게 얹어 내기 위해서다. 입 짧은 아들이 좋아하는 육포는 연한 소고기에 칼집을 넣고 전 굽기 쉽도록 손질하여 냉장고에 넣어 둔다. 생오징어도 몇 마리 집어 와야 한다. 육질 좋은 것으로 골라 와서 아들의 입에 쏘옥 들어갈 크기로 튀겨 대소쿠리에 가득 담는다. 해마다 이 일은 아버지 몫이었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아버지의 솜씨를 마주할 아이의 표정이 궁금하다. 그 외에도 아들이 손도 안 대는 음식으로 소문이 나 있는 문어를 비롯하여 상어 고기, 마른 오징어, 북어 등도 챙기는데 빈틈이 없다.

아들을 위한 장보기는 과일 가게 앞에서 화려해진다. 유난히 과일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시린 가슴을 안고 두 손 가득 아들의 입맛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퉁실퉁실한 거봉은 생전에 광주리째 끼고 앉아 씨앗까지 넘겨 가면서 먹을 정도였기에 터질세라 다칠세라 아들의 육신을 대하듯 싸안고 온다. 뒤 이어 오대양 육대주의 갖은 과일들을 고르는 데도 소홀함이 없다. 잘 먹는 과일은 잘 먹기 때문이고 낯선 과일은 살아 있을 때 못 먹여 본 한을 풀어 주기 위해서다.

생선장과 과일장은 큰 장에서 보되 나물장은 동네 어귀의 인심 좋은 아낙에게서 봐 온다. 미역, 고사리와 함께할 벗들은 요목조목 주인장의 손길을 벗어나 아버지의 장바구니로 옮겨진다. 무는 총총 잘게 채 썰어 비빔밥 하기 좋도록 만들어질 것이며, 미역은 미끈미끈하여 아들이 시큰둥하게 생각했었지만 버릇처럼 무 옆에 담을 채비를 한다. 시금치는 언제나 중간 자리를 차지한다. 파아랗게 데쳐서 수북하게 한 접시 담을 양으로 뿌리가 빠알갛고 나지막한 것으로 한 단 집어 온다. 뒤를 이어 속이 시릴 정도로 하이얀 박나물과 다시마는 가녀리게 썰어 얌전하게 자리를 잡는다. 고구마는 접시 위에 얹었을 때 위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듬직한 것으로 고른다. 두부는 가격대에서는 밀리나 운반에 있어서는 장군 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

앞마당의 대추는 가을볕에 곱게 물들여진 후 내년을 위한 준비에 들어갈 것이고 여리디여린 생고사리는 옥상의 장독 위에서 건조시켜진 뒤 나물 그릇에 담겨진다. 언제나 마음을 으뜸으로 생각하기에 옻칠을 곱게 한 목기도 열심히 매만진다.

팔이 아프도록 장을 보더라도 내 손길을 기다려 주는 이가 있다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번지도 알 수 없는 저승에 살고 있는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장보기는 가슴 자락을 시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