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거짓말 / 손경찬

cabin1212 2022. 7. 27. 05:49

거짓말 / 손경찬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던 딸이 제 방 속에 들어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 하듯이 종일 자기 생각 속에서 나올 줄을 모른다. 서너 걸음 앞에 있는 내 생애의 중심지인 딸과의 거리가 천리 같다. 어쩌면 딸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거짓말이라는 말을 감고 있을지 모른다. 곰 인형을 끌어안고 앉아 있는 딸에게서 어둠속에 앉아 있던 내 모습이 보인다.

영해시장 어물전에서 나는 자랐다. 어디 맡겨 질 곳 하나 없는 어린 나는 생선을 파는 어머니에게 짐처럼 매달려 있었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청상이 되어버린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했다. 등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엉치에 매달린 채 엄마 아빠라는 말보다 세상의 비린 냄새를 먼저 알아버렸는지 모른다. 어물전의 비린 냄새 속에서 걸음마를 배웠고, 손님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등을 바람막이로 나는 생선상자 안에서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주시는 돈은 언제나 구겨지고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다. 학교 기성회비를 낼 때면 포마드 기름으로 가지런히 빗질한 선생님 앞에 돈을 놓고는 제 빨리 뛰쳐나오곤 했다. 내 손에서 나는 비린내를 씻고 또 씻고는 몸에서 나는 냄새를 날려 버리려 송천강 둑을 종일 뛰어다녔다. 그러다가 허기진 배를 안고 다시 어머니가 있는 시장 난전을 찾곤 했다.

어느 날, 난전의 어머니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명태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와 어떤 아주머니가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나 뒹굴고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멀건 눈을 한 명태를 싱싱하다고 속여 팔았을까, 내주지도 않았으면서 잔돈을 거슬러 줬다고 우겼을까. 엿장수의 가위질 소리가 어머니의 악다구니에 묻혔다. 나는 발길을 돌려 대진 앞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송천강 둑을 다시 올랐다. 강물을 내다보며 나는 어머니를 시장바닥에 내 놓은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염천 삼복더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며칠째 시름시름 앓으시던 어머니는 열한 살의 나만을 세상에 남겨 놓고 말았다. 나한테는 하지 말라던 그 거짓말이 어머니를 데리고 가 버렸다. 나는 어머니가 거짓말을 많이 해서 돌아가신 거라 믿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어서 묻힐 땅도 묻어 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목재소를 기웃거렸다. 나무를 자르고 남은 길다란 나무껍질을 질질 끌며 몇 번이나 집으로 옮겼다. 면사무소에서 광목 한 필이 배급 되었다. 나는 나무껍질을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어머니를 눕혔다.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될 어머니를 광목으로 둘둘 말았다.

리어카에 어머니를 싣고 그 위에 방문 앞 기둥에 달려 있는 기름병을 얹었다. 마을 동장이 어머니를 실은 리어카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 뒤를 따라가는 어린 나는 내내 나는 죽어도 어머니처럼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절대 울지 않으리라 맹세하는 내 얼굴은 땀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관어대 뒷산 공터에 어머니를 내렸다. 나무껍질에 기름을 붓고 성냥을 그었다. 너울너울 불길이 솟았다. 나는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한 달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불도 켜지 않은 외딴 집에서 나는 혼자 어머니의 베개를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서 당신의 길을 가고 있다. 온 밤을 꼬박 뜬 눈으로 보냈다. 설핏 든 새벽잠이 아침 햇살에 쫓겨 달아났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뛰었다.

저 멀리 공터에는 뼈만 남아야할 어머니가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뛰던 걸음을 멈추고 나는 살금살금 다가갔다. 나무는 다 타고 어머니는 아랫도리만 잃은 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앉아 있었던 것이다. 혼자 된 자식을 두고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어머니는 밤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을 위해 다 내 놓은 어머니는 마지막 가는 길의 노자까지 부족했다. 나는 나무를 긁어모으고 어머니를 다시 눕혔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오느냐는 어머니의 걱정을 못 들은 척하며 에워 싼 나무에 다시 불을 붙였다.

삶의 질곡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도록 밟아왔다. 나는 공터에 혼자 앉아 있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머니는 아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게 하지 않으려 내게 무진 애를 쓰셨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기성회비를 내게 하려 비린내 나는 돈을 한푼 두푼 꼬장주 안주머니에 모았다. 철모르는 어린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았기에 어머니의 거짓말만 보았다. 여자 혼자 자식을 키우며 살아가기에는 버거운 세상이었다. 어머니의 그 거짓말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지는 세상을 조금씩 알아가면서였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도 세상을 잘 살아가리라 맹세했다.

먹고 살기 위해, 더 큰 것을 붙잡기 위해 열심히 살아오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부하지만, 정작 그 거짓말은 내 딸의 가슴에 앉아 있다.

출근 하는 내 목을 끌어안고 뽀뽀하는 딸에게 일찍 오겠다는 약속은 항상 거짓으로 남겨졌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어린 딸과의 많은 약속들. 어머니는 청상의 몸으로 어린 나와 먹고 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지만 나는 무엇을 위해 내 딸에게 거짓말을 남겨 놓았는가. 내가 중요시 한 게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내 딸의 밝은 웃음을 찾아 헤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