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열린 문 / 위상복

열린 문 / 위상복
비 내리는 오후, 교무실이 갑자기 훤하다. 멋쟁이 중년 여성이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눈길이 쏠린다. 낯설지도 않다. 담임할 때 도움받았던 학부모인가. 아니면 대학 동아리 후배인가. 잠시 기억을 더듬고 있을 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선생님, 안녕하세요. K 여고 제자 〇〇예요.”라고 한다. 막내아들 입시 상담차 학교에 들렀다가 내가 있다기에 찾았단다. 반가이 인사를 하더니, 혹시나 몰라볼까 봐 걱정되었는지 학창 시절의 추억도 한 보따리 풀어놓는다.
신임교사 시절의 이야기다. 나른한 봄날, 오후 수업 시간이었다. 점심을 막 먹고 난 뒤라 식곤증이 올만도 한데 아이들의 눈망울이 평소보다 더 또렷했다. 입시를 앞둔 3학년이라고는 하나 딱딱한 의자에 온종일 앉아 수업받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마치 내가 잘 가르치는 명강사라도 된 양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교육은 학생과 교사의 상호작용이라고 했던가. 경력이 짧더라도 소통만 잘 이루어지면 어지간히 성공한 수업이 된다. 여학교에서 근무하면 아무래도 남학생보다는 수업 반응이 좋다. 총각 선생이라 그런지, 별난 얘기를 하지 않아도 까르르 웃어주고, 물으면 대답도 직방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업에 열중하던 때였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면 신명도 난다. 열심히 하는 아이들 앞에 어느 선생이 힘이 나지 않겠는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빛났던 그날따라 목소리 톤이 점점 올라가고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설명도 술술 풀려나왔다. 한참 수업하는 중에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실장이 메모지를 살그머니 건네주었다. 평소 이미지도 반듯하고 얌전한 학생이라 아무 생각 없이 슬쩍 살펴보았다.
“선생님, 문 열렸어요.”
갑자기 교실이 캄캄해졌다.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깨서 중요 부위를 가리는 대문 단속을 소홀히 했는가. 그렇다고 ‘대문 열렸나.’라고 능청 떨며 바지를 확인하기엔 너무 젊지 않은가. 내 허리춤을 향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어둠 속에 사라졌다가 커다랗게 보이기를 반복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싸늘한 천장과 바닥과 벽과 창뿐이라, 숨을 곳은 없고 내 편도 없었다. 지금까지 누린 인기도, 쌓은 열정도 모두 날아가는 듯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힘써 익혔던 교육학의 어느 페이지에도 보이지 않았으니….
며칠 전 옆 반에서 겪었던 만우절의 악몽이 떠올랐다. 평소 잘 따르던 실장이 수업 중 손을 들더니,
"선생님, 질문 있어요."라며 다소곳이 일어섰다.
"아, 그래. 뭐야?"
"선생님, …… 절…… 좋아하세요?"
"……"
"아니, 선생님. 산에 있는 절 있잖아요?"
산속의 절(寺)인 줄도 모르고 나만 착각해 당황한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교실이 온통 뒤집어졌던 아픈 기억이다.
그래도 궁하면 통하는 법. 억지로 수습하느라고 진땀을 뺐던 일이 바로 엊그제인데, 두 번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문득 만우절 소동 이후 술자리에서 들었던 선배 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단점은 장점으로, 위기는 기회로. 어려운 것은 쉽게,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라는 그의 말대로 해결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치 임상 시험도 거치지 않은 약을 처방하는 새내기 의사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무작정 허공 속으로 발길을 내밀었다.
“야, 주번!”
“네에”
“나와서 문 닫아라.”
“……”
내 목소리가 너무 컸는가. 아니면 나의 반응이 의외였는가. 잠시 교실이 조용한가 싶더니, 이내 난리가 났다. 발을 구르며 손뼉 치는 아이, 책상을 탕탕 치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 폴짝폴짝 뛰며 얼굴을 감싸고 우는 아이…. 이런 걸 아수라장이라고 하는가. 교실이 떠나갈 만큼 야단법석을 떨다 보니, 교감 선생님이 놀라 4층까지 달려올 정도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던 순간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아이들이 놓은 덫에 연거푸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라도 보였다면 얼마나 실망했을까. 사실은 장난삼아 교실 문을 조금 열어놓고 내가 오해하게 만든 것이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바지춤을 손으로 더듬어 보지도 않았고, 몰래 내려다보지도 않고 수습했으니 신뢰감은 잃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오랜만에 만난 제자가 자랑스러웠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초임 시절로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나이는 들어도 여느 귀부인 못지않을 정도로 훌륭하고 당당하게 자란 모습이 고마웠다. 학교 다닐 때 메모지를 건네주던 수줍음 타는 모범생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제자와 즐겁게 보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