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반통 물 / 류영택
반통 물 / 류영택
큰형이 잘하는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직업인 운전이었고, 또 하나는 춤이었다. 부정적인 면이 강한 것을 잘하는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하루라도 카바레에서 6박자 스텝을 밟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춤을 춤이라 하지 않는다. 춤이란 말 뒤에는 꼭 바람이 따라붙는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큰형이 춤을 배우러 다닌다는 형수의 말에 집안에는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동생 바꿔라. 전화통을 붙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누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작 다른 걱정이 앞섰다.
춤은 혼자 출 수가 없다. 지르박, 탱고, 브루스, 하나 같이 상대가 있어야 출수 있는 춤이다. 처음에는 학원 강사가 손을 잡아주겠지만 웬만큼 춤을 추게 되면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에게는 함께 춤을 추자며 손을 내밀 사람이 없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날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나 않을까. 저만치 외떨어져 있을 형의 모습을 떠올리니 오히려 안됐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를 때 '선아'라고 했다. 집안에 맏이였던 누나의 이름 끝자리를 따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상급생이 됐을 때 누나가 시집을 갔다. 아버지는 이제 출가외인인 누나의 이름대신 다른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형제들은 가운데 자가 영자 돌림이고. 끝 자가 중, 진, 택 이었다. 큰형은 서열상 집안의 맏이인 자신의 이름인 ‘영중‘아 하고 부르리라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큰형의 바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의 대명사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를 때마다 마땅히 부를 호칭이 없어, '봐라!' 아니면 '어이요!'로 불렀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큰형의 어깨는 자꾸만 쳐져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예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아버지는 큰형이 하는 일은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하는 일마다 못마땅해했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물 드므 앞에 내려놓은 반통 물 때문인 것 같았다. 큰형은 키도 작았고, 덩치도 없었다. 아버지는 형이 지고 온 물지게에 물이 반밖에 담겨 있지 않은 물통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저 몸으로 동생들의 든든한 바람막이 역할을 할 수나 있을까. 아버지는 맏이인 큰형보다 당신을 닮은 덩치 큰 작은형을 더 미더워했었다.
그날은 밤이 이슥하도록 장에 가신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술이 취해 오시지나 않을까. 까만 그을음을 내며 타들어가는 호롱불을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이제 간간이 들려오던 동구 밖 개 짖는 소리도 끊어지고, 스쳐가는 칼바람에 파르르 떨려오는 문풍지 소리가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귓전을 파고들었다. 저 번 장날처럼 긴 밤을 지새워야 하나. 주막에 내걸어둔 등불마저 꺼져갈 시각, 삽짝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들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후다닥 뛰쳐나가 서열 순으로 줄을 섰다.
'아부지 다녀오십니꺼!'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험, 아버지는 다시 기침을 하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鎭아, 아이들 재우지 않고!' 술이 거나하게 되신 아버지는 그 말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놓은, 결코 바뀌지 않을 호칭을 술기운을 빌려서 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던 것 같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대명사를 부르기까지는 봄에 시집간 누나의 배가 남산만큼 불러올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는 두레박에 물을 가득 채우고 큰형의 뒤를 따랐다. 그날따라 물지게를 지고 가는 큰형의 어깨가 유난히 작고 연약해 보였다.. 저러다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건들건들 몸이 흔들리고, 물지게가 기우뚱거릴 때마다 물통도 따라 요동쳤다. 퉁 하고 튀어나온 돌덩이에 통이 부딪히자 내 손에 들린 두레박의 물보다 더 많은 양의 물이 월컥 쏟아져 나왔다. 형, 내가 지고 갈까? 걱정이 되어 내가 대신 지겠다고 하자, 큰형은 벌써부터 물지게를 지면 키 안 큰다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집 가까이 왔을 때, 물통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있는 틈을 타 나는 두레박에 담긴 물을 물통에 채웠다. 내가 큰형을 도울 수 있는 일은 반통 물에 물을 보충하는 일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큰형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설핏 스쳐갔다. 그게 물지게를 지고 가는 큰형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튿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댓돌 아래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있는 큰형의 고무신이 모를 세운 채 뒹굴어져 있었고, 얼마나 급했던지 대청마루에는 작업복이 뒤집혀진 채 널브려져 있었다. 그렇잖아도 짧게만 보였는데 가랑이가 둥둥 걷어진 채 놓여 있는 큰형의 바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했다. 밭갈이를 하러 들에 나갔던 큰형은 서둘러 도망치느라 소(牛) 입에(牛) 채워둔 부리망도 벗기지 않은 채 집을 나가고 말았다.
몇 달 그러다 말겠지,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춤을 못 출거라는 내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형은 점점 더 깊이 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젠 집안일에도 무관심했다.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의논을 하려고 전화를 하면 큰형은 '동생 편한 데로 해라.' 그 말 뿐이었다. 물론 대구에서 멀리 떨어진 속초에 살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막내인 나를 유달리 아꼈던 어머니가 우리 집에 함께 살고부터 더 한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큰형을 대신해 내가 집안일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친척들은 그럴 때마다 큰 말이 없으면 작은 말이 큰말 노릇한다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그럴수록 집안의 대소사에 더 열심히 쫓아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큰형은 일가친척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갔다..
큰형이 세상을 떠나기 이태 전, 부모님 제사를 모시기 위해 큰형이 사는 속초에 갔다.
오늘 하루쯤은 춤을 빼먹어도, 아니 택시를 탈 손님이 줄을 서있더라도 일찍 귀가해야 할 텐데 밤이 깊도록 큰형은 오지 않았다. 형제들의 눈치를 살피는 형수를 대신해서 오늘은 기어코 한 마디 해야지. 나는 속으로 단단히 마음을 먹고 큰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형은 제사를 모실 시간이 임박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 왔나?”
나는 현관문을 들어서는 형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하나하나 담아두었던 원망들을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키는 작지만 현관문이 좁다 하고 쫙 벌어진 덩치라도 되었더라면……. 신발을 벗느라 웅크리고 있는 형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 왜소해 보였다..
그렇잖아도 코끝이 찡해오는데 큰형의 팔목에 덜렁거리는 작은 돈 가방을 보니 원망은 고사하고 형을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핸들에 매달리듯 엉덩이에 방석을 세 개나 포개고 앉아 하루 종일 일을 하다 보면 얼마나 마음 다칠 일이 많을까. 곁눈질하는 손님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자신의 몸을 가방 속에 가두어놓고 싶지나 않았을까. 가방은,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채울 수 없었던 지난날 큰형의 물지게에 채우고자 했던 반통 물 같았다.
큰형은 어머니의 기일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제야 큰형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몸소 느낄 수가 있었다. 나름대로 큰형을 이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와 형제들은 진정 큰형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귀찮은 일은 늘 큰형에게 미루고, 맏이가 돼서 그것도 안 하고 뭐하냐며 원망만 했었다.
집안의 대소사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일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나는 욕먹을 일이 없었다. 가면 '형 대신에 네가 애먹는다.'는 인사도 듣고, 안 가면 그만인 게 지차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백팔십도 바뀌어버렸다.
어쩌다 집안의 큰일에 참석하지 않으면 그놈 인간 되려면 아직 멀었다며 화살이 곧바로 내게로 날아온다. 늘 칭찬만 듣던 내가 어느새 해도 해도 욕만 먹는 큰형의 자리에 와 있었다. 모든 것을 내게 맡기고 춤만 추러 다니는 형이 너무 태무 심하다며 때로는 원망했었는데 그 자리는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밤늦게 전화벨만 울려도 간이 툭 떨어지는 자리가 맏이의 자리였다.
형이 있어 내가 더 빛이 났고, 내 물통에는 늘 칭찬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자신의 작은 체구로는 어쩔 수 없는, 다 채우지 못한 반통 물에 큰형이 정작 채우고 싶었던 것은 춤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사랑, 가족들의 사랑, 맏이로서의 존재감을 인정받는 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