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임의 상처 / 금은주
임의 상처 / 금은주
산사로 가는 길은 꽃 대궐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요’하며 바통을 이어가던 봄꽃들이 떡 벌어진 잔칫상을 차린다. 연초록의 이파리들은 행주질 잘 된 포마이카 상처럼 반질댄다. 반드러운 상 위에 열두 색 꽃들이 어지럽다. 북적대는 꽃놀이꾼들과 초파일 연등 행렬이 보태어 조금의 현기증이 인다.
세상의 모든 빛깔들이 절 집 마당에 가득하다. 연등은 하늘을 덮었고 오가는 상춘객이 분주하다. 저 멀리 종종색색의 틈 사이로 무명저고리를 걸친 임이 망막에 날아와 맺힌다. 풀기는 없으나 흐트러짐이 없고 바래이었으나 말쑥한 모습이 오롯하다. 흔하디흔한 단청도 없고 이리저리 탱화도 없다. 수덕사 대웅전은 치장이 없다.
빗질 잘 된 머리칼에 무명저고리가 고작이다. 거드름 피우는 모자도 없다. 번질거리는 비단 옷에 도포 끈을 휘날리지도 않는다. 편안하다. 너그럽다. 그래서 내 편 같다. 일주문을 지나 단숨에 달려온 하나의 이유이다. 눈부심은 없어도 초라하지 않다. 의젓하다. 결구의 노출로 내숭이 없다. 목소리는 낮고 살결은 부드럽다. 털털한 임의 자세는 끌어당김이 있고 귀는 활짝 열려 있다.
임이 곁을 내어준다. 불룩한 배 기둥에 기대어도 보고 어루만져도 본다. 땀이 식느라 서늘하던 등줄기가 더워진다. 겉마른 빈손이 잦아든다. 허허롭던 가슴이 찰방거린다. 어리바리했던 눈빛이 허물어진다. 임은 귀착된 안도의 호흡이다. 나누인 체온이다. 무장 해제시키는 시선이다.
휑한 가슴이 임의 온기로 만공전하다. 덧난 생채기의 무삼앓이는 토닥이는 임의 손길로 고요하다. 고질병이 말끔하니 마음 문이 열리고 시야기 넓어진다. 내 신변이 편해야만 옆을 둘러보는 게 비좁은 여편네 소견이라. 이제 확장된 시선으로 새삼 임을 찬찬히 올려다본다. 임은 머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우뚝한 산봉우리다. 끄떡없는 바위다. 천 년을 한 자리다.
훌훌히 시선을 옮기는데 문득 눈길이 머무는 곳이 있다. 한 아름의 돋우라진 옹이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왜 여태 눈에 띄지 않았을까? 임의 가슴 한 복판에 저리도 커다란 멍울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무심한 성정이 낯 뜨겁다.
짐짓 너그러운 체 옹이를 들어다본다. 세월의 흔적들은 바람에 날려 보내고 세월만 남아 있다. 그 세월조차 무방비상태로 오그라들어 바람은 하릴없이 깊은 골 사이를 들락인다. 구멍 숭숭 뚫린 임의 가슴이 시리다.
옹이는 임의 과거다. 임의 옛이야기다. 애틋한 별리의 흔적이다. 기실 나무꾼 도끼에 무참히 쓰러지는 순간까지 함께였으리라.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함께 바라보았을 것이다. 산짐승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산 그림자 이불을 함께 덮었을 게다. 노니다. 꼬리 감추는 새벽안개로 서로의 낯을 씻었고 가만한 바람에도 몸단장을 했을 것이다. 나누인 정분으로 성숙했고 성숙한 정인을 바라봄이 벅찬 나날이었으리라.
임의 소꿉놀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임은 쓸모없는 재목이 되어야 했다. 필요 충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우람한 기둥으로 서야만 했다. 잘려나간 가지의 아픔쯤은 잊어야 했고 먼 산의 밀어는 전설로만 남겨둬야 했다. 지지한 사랑타령만 늘어놓으며 맥을 놓을 수도 없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야 했고 충성스러운 군인이 되어야 했다. 처의 빈 지갑도 채워야 했고 홀로이 텅 빈 일터에 불을 밝혀야 했다.
감춘다고 숨겨지는 상처가 아니다. 세월을 이겨내는 장사가 아님에 임도 늙고 보살피던 많은 것들이 임을 떠났다. 하나둘 떠난 뭇 것의 자리에 가슴 밑바닥에 숨겨진 옹이가 돋우라진다. 임도 늙고 옹이도 늙었다. 눈물 마른자리에 주름이 골 깊다. 몇 겹의 딱정이가 떨어지진 자리에 갈비뼈가 앙상하다.
이내 가슴앓이만 조급해서 임의 상처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모름지기 임은 그래야만 한다고 누가 말했나? 이 땅에 아내는, 누이는, 못난 어미는 그랬다. 그지없는 발전과 성과를 요구해대며 어리광을 부리고 생떼를 쓰고 채근했다.
어쩌면 임은 정인과 함께 지게다리가 되어 나무꾼의 등에 매달려 뒷산을 누비고 잎었을 게다. 불쏘시개가 되어 한 날 한 시에 부나비처럼 훨훨 타오르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잡은 손 놓지 않는 디딜방아가 되어 여느 집 마당의 햇살 가득한 어느 하루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절 집 마당에 서서 애잔한 마음으로 임을 올려다본다. 기품 있는 모습으로 초연하게 서 있지만 빛나는 나날들만 있었으랴. 어깨에 달려있는 태산 같은 기와의 짓눌림도 버텨야했고 가을봄 없이 몰아치는 산곡풍도 막아내야 했다. 숱한 밤 잠 못 이루는 형벌 같은 이로움도 이겨내야 했고 고곡하게 서 있는 마당 아래 보리수의 거드름도 참아내야 했다. 모든 걸 내어 준 임의 살빛이 맑다. 임의 상처에 햇살이 유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