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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묘우妙友 / 박경대

cabin1212 2022. 12. 5. 06:02

묘우妙友 / 박경대

 

 

친구가 아프리카로 떠나갔다. 무려 오십 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였다.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멀어지더니 결국 나를 떠난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첫 출석부를 부를 때였다. 언제 나를 부르시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내 이름을 거꾸로 호명하셨다. 대답을 해야 될까 머뭇거리던 순간 누군가 하고 대답을 하였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출석을 다 부른 뒤에 알아보려고 하던 중 내 이름이 호명 되었다. 대답은 하였지만 느낌이 묘하였다.

쉬는 시간이 되었으나 모두 낯선 친구들이라 서먹하여 무심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치면서 아는 체를 하였다. 돌아보니 어떤 친구가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이 애가 누구일까 생각하는데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나라는 것을 알았다며 반갑다고 하였다. 그는 놀랍게도 나와 이름이 반대인 바로 그 친구였다.

누구인지 몰라 궁금해 하는 나와 달리 그는 나의 집까지 알고 있었다. 수업시간 내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물어봐도 잘 생각해 보라며 웃기만 하였다.

하굣길에 친구는 나와 바투 걸으며 자기를 정말 모르겠느냐고 물었다.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더니 너 유치원 중퇴했지?’라고 물었다. 묘한 친구의 물음에 까무러칠 뻔했다. 그는 나의 별스런 이력도 알고 있었다. 친구는 집에 가서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남기고 헤어졌다.

초등학교 앨범을 샅샅이 뒤져봐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유치원을 중퇴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더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렴풋이 유치원 친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퇴를 한 나에게는 졸업 앨범이 없었다. 졸업을 하지 못한 이유는 우습게도 새로 산 신발을 신고 갔다가 잃어버린 것 때문이었다.

다음 날, 첫 수업을 마치자 예상대로 그가 다가왔다. 생각을 해 보았느냐는 말에 J유치원 나왔지.’하고 넘겨짚어 보았다. 그는 그래, 이제 기억이 나는 모양이네.’라며 반색했다.

친구는 유치원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듣다 보니 신발을 숨겼던 것은 바로 그의 짓이었다. 그 장난으로 유치원을 그만 두었다는 말에 친구는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는 사과의 뜻으로 집으로 가던 중 단팥죽을 사주었다. 길거리 포장마차가 아니고 고급 빵집에서였다. 친구의 주머니 사정보다 중학생이 이런 곳에 들어와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우정은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가 되었다. , 하교는 물론 학교 안에서도 늘 붙어 다녔다. 교실에서는 아예 짝꿍으로 지냈다.

가까이 지내다 보니 그를 조금씩 알게 되었는데 알아갈수록 멋있는 놈이었다. 책을 열심히 보는 것 같지 않았으나 성적은 항상 일, 이 등이었고 조용하고 덩치도 크지 않아 샌님인줄 알았던 그는 싸움도 프로였다.

어느 날, 학년의 최고 싸움꾼이 시비를 걸어와 싸움이 났다. 그는 학교 옆 공사장에서 주먹 세 번과 하이 킥 한 방으로 상대를 깨끗이 잠재워 버린 무서운 친구였다. 그 사건이후, 나도 처음 들어보는 출처불명의 소문까지 나돌아 고소를 금치 못했다. 당시 인기 무술영화의 주인공이던 이소룡이 쓰던 쌍절곤도 기막히게 잘 쓴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에게도 시비를 거는 친구는 없었다.

성은 같아도 이름이 거꾸로인 둘이서 붙어 다니니 친구들이 재미있어 하고 놀리기도 하였다.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지만, 같이 다니다 보면 그의 행동이 나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탁구를 치러 가자고하면 그는 출입이 금지 되었던 당구장을 가보자고 하였고 만화를 보자고 하면 영화구경을 시켜 주었다. 의견이 다를 때 친구는 대부분 나의 뜻을 따라 주었으나 거침없이 행동하는 그가 늘 부러웠다.

그해 여름, 친구의 집으로 놀러간 적이 있었다. 맛있는 것을 자주 사는 친구라 부자일거라 짐작은 했지만 실지로 가본 그의 집은 엄청났다. 넓은 정원 한쪽에는 조그마한 수영장도 있었다. 선풍기조차 귀하던 시절, 얼음처럼 찬바람이 나오는 신기한 기계가 있었다. 에어컨이라는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거실에는 만화방에서 돈을 주고 보던 텔레비전이 있었다. 크기도 평소에 보던 것 보다 서 너 배는 더 커보였다. 친구의 어머니가 먹으라고 가지고 온 과자는 처음 먹어보는 미제과자였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 집과 비교할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의 행동은 더욱 두드러졌다. 친구는 어느 날 학교 옆 시장의 선술집에서 나에게 막걸리를 먹고 담배를 피우는 시범을 보여 주었다. 상급생이 주위에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겁나는 것이 없어 보였다.

대학에서의 첫 미팅 날 이었다. 앞에 앉은 파트너가 어려워 부끄러워하는 나와 달리 친구는 파트너 옆에 앉아 어깨에 손을 올리고 러브 샷을 하고 있었다.

미팅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친구를 보았다. 그는 파트너와 함께 자리를 옮길 생각이라며 먼저 가라고 하였다. 그때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괜히 비를 맞고 싶었다. 친구의 용기를 부러워하며 번잡한 도로를 한없이 걷고 싶었다.

그로부터 삼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에게 새로운 친구인 S가 홀연히 다가왔다. S와 나는 죽이 잘 맞아 친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삶의 진면목을 알려 주었다. 나의 분신 같았던 묘우(妙友)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출국수속을 하고 있는 묘우는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에 살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잘 가라는 말 한마디를 끝으로 그와 나 사이, 오십 년의 인연은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나의 새로운 친구 S 때문에 떠나버린 것이었다.

멀리 떠난 묘우는 어린 시절부터 싹 튼 욕망이 많았던 나였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해준 글쓰기가 오십 중반에 만난 친구 S였다. (2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