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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아이의 꽃 성 / 이용옥

cabin1212 2022. 12. 12. 06:26

아이의 꽃 성 / 이용옥

 

 

  작은 계집아이다. 입도 코도 얼굴도 그리고 키도 작다. 게다가 말라깽이다. 유일하게 큰 것은 푸른 눈, 아쿠아마린처럼 신비하게 빛나는 푸른 눈만이 계집아이의 얼굴 양쪽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오늘도 아이는 나를 찾아왔다. 책가방에 신주머니까지 들고 있는 걸로 봐 집에 들르기 전인 것 같다. 아이는 사방을 살핀다. 제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자의 본능 같은 행위다. 그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모름지기 약하고 외로운 것들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살아남을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몸을 낮춰 나를 부른다. “나비야, 나비야….” 라라나 소냐, 혹은 안나 같은 이름이 어울릴 듯한 노랑머리 계집애의 낮고 명료한 한국어 발음이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나는 ‘야웅’하고 짧게 답하며 두어 발 뒷걸음질을 친다. 인간이라는 족속들과 공존하면서 생긴 습관적 경계심이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서너 발짝을 다가온다. 허름한 뒷골목, 아무렇게나 쌓인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나와 그 애의 눈길이 푸른빛 평행선을 그린다.

  나는 눈길을 거두고 몸을 돌린다. 그리고 서서히 반달음박질을 친다. 아이도 나를 따라 뛰어온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머릿속으로 몇 개의 장소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가겟집 옆 정자, 아니면 마을 앞 공터? 군부대 입구 상가? 이 아이와 함께 있으면 늘 고민이 된다. 예기치 않은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곤 하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아이를 놀이터로 이끌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언제나 혼자인 그 애가 동무들과 놀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놈들은 먹이를 만난 야수같이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그 애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까막눈스키’, ‘로스케 양공주’라고 놀려댔다. 아이에겐 엄연히 ‘지은영’이라는 토속적인 이름이 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아이 엄마를 들먹이며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을 지껄여댈 땐 그 놈들의 발뒤꿈치를 확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제까짓 것들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인단 말인가.

  은영이 엄마와 아빠의 결혼에는 사연이 있다. 40이 넘은 늙은 총각과 열여덟 아가씨의 혼인이라는 것뿐 아니라 신부의 푸른 눈에 인형 같은 얼굴의 러시아 사람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은영 아빠는 은영 엄마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줄줄이 있던 그녀에게 사랑보다 사는 일이 더 급했다. 돈을 벌어야 했고, 그 돈을 고향에 부쳐야 했고, 동생들 치다꺼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럴듯한 일거리는 없었다. 저녁 출근과 새벽 귀가, 이어진 불화와 폭력, 이혼…, 아빠에게 남겨졌던 은영이는 할머니 네와 고모 집을 전전하다 엄마에게 돌아왔다. 강하게 친권을 주장했던 아빠는 일 년도 안 되어 두말없이 아이를 내줬다. 저녁이면 일을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제 자식과 부모형제를 놓지 못하는 은영이 엄마가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허긴, 인간이라는 족속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난 안다. 오죽하면 파스칼인가 하는 철학자는 자기네 스스로를 ‘모순투성이의 괴물 같은 존재’라고 했을까. 툭하면 윤리 도덕을 내세우고 사랑과 존중을 들먹거리지만 정작 그것들을 실천해야 할 때엔 온갖 구실을 붙여 외면하지 않던가. 나도 한때 부잣집 애완 묘로 ‘우리 아기’니, ‘막내딸’이니 하는 달콤한 이름으로 불렸던 적이 있다. 그러나 병에 걸려 털이 빠지고 기운이 없어지자 그들은 가차 없이 나를 버렸다. 병든 길고양이 몸으로 낳은 내 생애 마지막 자식마저 자기들 맘대로 뺏어갔을 때는 끓어오르던 울분을 어쩌지 못해 몇 날 며칠을 울부짖었다.

  “눈이 파란 고양이야, 꽤 가격이 나가겠는 걸.”

  아직도 귀가에 맴도는 비수 같은 소리. 내 자식마저 인간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버려지고 말리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나는 기억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시내 반대쪽으로 길을 잡았다. 지금 중심지로 들어가 봤자 놈들을 다시 만날 게 뻔하다. 이번에 잡히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다. 놀이터 갔던 날, 은영이가 당하는 것을 보고 놈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나는 무작정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예상대로 놈들은 나를 잡으려고 길길이 뛰었다. 그때를 이용해 달아나길 바랐지만 바보 같은 계집애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애에게 마음을 쓰다 방심한 틈에 그만 내가 잡히고 만 것이다. 둘 다 놈들의 장난감이 될 것 같아 발톱을 세웠고, 그중 한 놈의 팔뚝에 생채기를 내고서야 우리는 놓여날 수 있었다.

  처음 그애 집에 갔던 날이 그날이었다. 낡은 침대와 옷장이 하나씩 놓인 반 지하방.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여행용 가방 두 개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엄마가 출근하고 나면 아이는 그 적막한 집에서 혼자 밤을 지새울 것이다. 모질고 고약한 인간들과 더는 얽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아이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거다. 이 어린것이 꼭 내 새끼 같아서, 울부짖으며 엄마를 찾았을 내 아기를 지켜주지 못해서….

  얼마를 왔을까, 마을 모퉁이 공터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그걸 본 아이 얼굴에 화색이 돈다. 나는 꽃대 사이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선다. 아이도 꽃무리를 헤치며 따라온다. 제 키만 한 꽃들 사이에 선 아이가 꼭 한 송이 흰 코스모스 같다. 꽃송이에 코를 대고 큼큼거리던 은영이가 훌러덩 뒤로 나자빠진다. 까르륵거리는 아이의 푸른 눈, 그 눈에 일렁이는 꽃물결, 은영이를 받아 안은 코스모스가 따라서 웃음을 터뜨린다. 흥에 겨운 나도 풀썩 아이 곁으로 뛰어든다.

  이 작은 계집애와 나는 지금 코스모스 성에 갇혔다. 이곳에서 우린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이 이방인의 꽃 성 안에서 우린 더 이상 달아나자 않아도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