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핋]만원 버스 예찬 / 김영관
만원 버스 예찬 / 김영관
아스팔트 포장이 뭉글거리는 팔월 한낮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정류장에 도착했다. 좁은 의자에 앉자 전자 안내판을 확인했다. 내가 탈 급행 2번 버스가 전 정류장을 출발했다는 자막이 떴다.
버스에 올라 카드가 들어 있는 지갑을 체크 부분에 대자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가 경쾌했다. 승객은 나 말고 두 사람뿐이었다. 차 안은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시원했다. 좌석에 느긋하게 앉아 스쳐 지나는 거리를 내다보는데 70년대 만원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러시아워라는 말이 유행했다. 등하교 시간대에는 만원 버스가 아니라 콩나물시루라는 별칭이 당시의 시내버스였다. 정류장은 흡사 피난민을 태우는 것처럼 아수라장이었다. 마지막 승객이 간신히 한 발을 승강장 발판에 올리기가 무섭게 여자 차장은 승강대 손잡이와 난관을 붙잡고 몸으로 손님의 등을 떠밀며 ‘오라~이~’를 외쳤다. 버스가 출발하면 차장은 소리소리 질렀다. ‘안으로 들어서 주세요! 안으로!’
승강장 문을 겨우 닫은 버스가 오른쪽 커브를 빠르게 돌고 두어 번 급 브레이크를 잡을 때마다 버스 안에선 아우성이 터졌다. 몇 번의 아우성 뒤엔 신기하리만큼 차장이 서 있는 출입문 쪽은 공간이 생겼다. 그래서 차장은 다음 정류장에서 또 승객을 태우는 고무풍선 버스였다
나는 만원 버스를 이용 몇 정거장을 가야 통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되도록 내리기 쉬운 승강장 입구를 고수하려 애를 써봤지만, 매번 역부족이었다. 키가 작은 난 손잡이도 놓친 채 거센 물결 위의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다 나의 발이 학생의 발 위에 얹혀 안절부절못하기 다반사였다.
만원 버스엔 소시민들이 힘들게 이용하고 있었지만, 양보와 배려의 실천 장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버스에 오르면 뒤에선 비명을 질러대도 힘센 남학생들은 그분들의 자리만큼은 기어코 마련했다.
비 오는 어느 날이었다. 재래시장 앞 정류장에서 한 아주머니가 고기 광주리를 들고 올라오며 얼굴 가득 울상을 지었다. 그때였다. 비린내 나는 광주리를 자신의 발 앞으로 당겨주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남학생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땐 그랬다. 만원 버스에는 공동생활의 덕목인 웃어른에 대한 공경심의 시범장이었다. 그리고 살아가는 인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버스 뒷부분에서는 발랄한 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있었다.
“숙이, 걔 이상해, 어제도 만나는 걸 봤는데 물으면 딱 잡아떼더라.”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발랄했다.
“요번엔 수학에서 망쳤는데 방학 때 꼭 보충해야지.” 짱구머리 남학생의 눈빛은 역시 맑고 빛났다. 그 옆엔 회화책을 들고 있는 머리가 조금 긴 대학생도 있었다. 모두 아침의 만원버스에서만 볼 수 있는 희망찬 모습들이었다. 가끔 옆 차선에 서 있는 까만 승용차를 내려다 보면 뒷좌석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 모습이 참 외로워 보였다. 문득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던 그때의 만원 버스가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