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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존재의 빛깔 / 김선화

cabin1212 2023. 7. 28. 06:16

존재의 빛깔 / 김선화

 

 

반투명한 창을 열자 사각 액자 속 풍경이 와락 달려든다. 통유리틀 저편에서 유유한 산의 몸짓. 사계의 흐름 따라 변화하는 그림이다. 연록에 넋이 빠져 하루가 기울고, 희붉은 제철 꽃에 가슴 저민 게 몇 해던가.

그런데 그 산이 지금 잘려나가고 있다. 자연 액자요, 자연 병풍이던 앞산 능선이 댕강 잘려 길이 날 모양이다. 야밤에도 이른 새벽에도, 중장비 몇 대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매우 침착한 동작이다. 포클레인이 앞장서서 연방 고갯짓을 하고, 궁둥이를 위쪽으로 바짝 들이민 덤프트럭은 45도 이상의 각도로 대기 중이다. 엉거주춤한 품새가,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하는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잔설이 깔린 나무 사이로 이미 황토가 드러났다. 표면을 푹푹 찍어 선을 긋고 원래의 것을 깎아내리는 저 몰인정한 풍경. 그 장면을 지켜보는 가슴이 형용할 수없이 휑해진다. 이제 곧 앞산의 종전 모습은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 아이들과 올랐고, 글공부하는 학생들과 철따라 오르내리며 꽃놀이를 즐기던 낭만 어린 곳. 그 능선 하나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세상엔 애초의 것이 얼마나 존재할까. 그것은 자칫 사람을 편협하게 하는 위험요인을 안고 있기도 하다. 한 가풍에서부터 정치풍토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것이면 그저 케케묵은 것으로 치부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애초에 존재한 이 빛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으로 작용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원해진 사람들 간에도 ‘우리는 원래 막역한 사이였지’ 하는 이해가 따르는 순간, 서운한 감정들이 한낱 물거품으로 녹는다.

근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매사 흐르고 흘러 변화하는 속에서 고정불변의 원형이 있기나 한 것일까. 우리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 다만 그 폭이 크고 작을 뿐이다. 급격한 변화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 당황하기도 하고, 반가워 장단을 맞추기도 한다. 반면 미세한 변화 앞에서는 그 파장이 크지 않아 보슬비에 옷 젖듯 익숙해져간다. 한데도 사람들은 툭하면 “그것이 본시……” 하면서 말꼬리를 잡고 대응하기를 즐긴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원래는……’ 하며 목에 힘을 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난문제는 수학공식을 들이댄다 하여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종종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유형과 무형의 가치. 그리고 그 빛깔. 그것도 세세한 교감으로 존속하는 사람들 관계에 있어서이랴.

특히 남과 여가 공존하는 정신적 세계는 무한대이다. 이성의 존재는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빛이다. 그 빛깔은 자연의 변화 따라 갖갖의 색감으로 일렁인다. 상대방이 곧 자연현상에 이입되어 서로를 동화시키는 까닭이다. 그래서 사랑에 눈이 멀면 구속을 원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유형의 지배라기보다 무형의 지배이다. 존재의 빛깔에 에워싸이는 것은 평이한 대상에게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기이한 기운이 감돌 때는 보물 중의 보물로 가슴에 쟁여야 한다. 아울러 그것은 고이 여미고 내보이지 않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참으로 묘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 그 무한한 세계에서 지배를 꾀하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늘 누군가의 그늘을 그리워한다. 다른 말로 관리를 요한다. 어딘가에 나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데서 힘을 받고, 나 역시 그러한 존재로 서있을 때 세상은 아름답게 빛나지 않던가. 그건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의 위안이다.

언젠가 소령원을 돌아보며 한 나라의 왕을 품었던 여인에게 매료된 일이 있다. 영조대왕의 어머니 숙빈 최씨이다. 장희빈 사건 등의 당쟁 속에서 혹독히 외로움을 겪던 숙종 임금을 가만가만 보듬던 넉넉한 여인. 한 나라의 임금이라 해도 가끔은 어린아이같이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주체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럴 때 포근히 감싸주던 숙빈 최씨. 최 무수리로도 알려져 있지만, 그 품은 한 임금에게 있어 거대한 우주였으리라. 마침 묘역을 둘러싸고 있는 전나무 울타리가 외로운 세상 서로 안고 가던 두 사람의 정신적 공간으로 다가와,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가는 타성의 위력. 그것이 곧잘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최근 들어 소속 단체의 문예잡지가 낯설어졌는데, 그 이유는 책의 스타일이 대폭 바뀐 데에 있다. 시대의 변화 따라 수필도 새롭게 쓰자는 목소리가 높은 마당에, 책의 스타일 변화 정도에 뭐 그리 정색할 일이겠는가. 고약스런 심술쟁이처럼 구는 내가 못나 보일 수밖에.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돌려먹으려 해도 그것이 이미 낯설지 않은 것이어서 오히려 낯선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아무려나 지금 서있는 자리가 진행이며, 끝이며, 다시 시작이다. 늘 제자리에서 의식의 닻을 올리고 다시 내린다. 매번 현재의 위치에서 끝을 내고 시작을 하는 모순의 반복. 아이러니하게도 기막힌 용단이다. 이 아름다운 순환이 세상을 굴린다. 그 존재 여부를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우리 동네 앞산은 곧 새로운 세계를 선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