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수필]시장(市場) 가는 길 / 류영택
시장(市場) 가는 길 / 류영택
은행나무 가로수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따스한 가을 햇살처럼 아내의 입가에 피어난다. 딸아이도 덩달아 웃는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 웃는다.
벽을 바라보고 있던 아내가 오늘이 며칠이냐며 말을 붙여온다.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달력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새삼스레 날짜를 묻는 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4, 9, 14, 19 이방장도 아니고 왜 날짜를 묻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고 이방장이 아니길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일전에 아내와 함께 이방 장을 찾았다. 마침 일요일과 장날이 겹치는 날이라 장터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장터를 한 바퀴 돌고 곧장 집으로 왔으면 될 텐데, 긴 시간 동행해 준 아내가 고맙기도 하고 먼 곳까지 왔는데 이곳 명물인 국수를 맛 보이고 싶었다.
국숫발이야 어디를 가나 매한가지겠지만, 이곳 국수는 육수가 특이하다. 소피 국에 시래기를 우려낸 것이다.
아내는 국수를 무진 좋아한다. 평소 밥 반 공기밖에 안 먹는, 군주정도 하지 않는 아내는 국수만 보면 환장을 한다. 밥그릇이 아닌 양푼이다 말아먹는다. 바싹 마른 몸에 어디로 들어갈까 의심이 갈 정도다. 먹는 것도 그냥 먹는 게 아니다. 젓가락으로 국숫발을 건져 올리기 바쁘게 후루룩 빨아 당기면 국숫발이 꼬리를 흔들며 빨려 들어간다. 마치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것 같다. 음식은 씹는 맛이라는 데 아내는 씹지도 않고 넘긴다.
맹물에도 국수를 말아먹어도 맛있다고 할 사람이 그렇게 맛있는 국수를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날 이후 아내는 이방 장날과 일요일이 겹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 이방 장과 일요일이 겹치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도 그른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여보, 사진촬영 안가요?"
"만사가 귀찮소, 그냥 잠이나 잘라요."
"국수 먹고 싶은데."
"국수 값보다 기름 값이 더 나오겠소. 자장면 시켜 먹으세요."
"면허증을 따든지 해야지.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어요!"
아내의 말투를 보니, 더러워서 면허증을 따야지 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 더 누워 있으면 아내는 삐친다. 그러면 일주일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보름을 삐친다 해도 그냥 누워 있고 싶었다.
나이 탓인가. 분명 삐져야 할 아내가 평소와 다름없었다.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 안 하고 단식투쟁을 하면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가. 그래, 함께 산지가 얼만데. 이제 내 성질을 알고도 남지. '참말로 밥 안 먹을 끼가!' 단식투쟁하는 아내를 어르고 달랬던 일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났다.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아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돌아눕는다.
"여보, 화원 장에 갑시다."
살살 웃고 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화원 장마저 못 가겠다 하면 지난번 유예했던 일주일에 한 주가 더 추가되어 보름은 말을 하지 않을까. 아내의 표정이 금세라도 마귀할멈으로 돌변할 것만 같았다.
"일요일이 정말 싫다."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딸아이는 앞장서 걷고, 나는 손수레를 끌고 뒤를 따른다.
[출처] [좋은수필]시장(市場) 가는 길 / 류영택|작성자 에세이 자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