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안개 / 조경숙

cabin1212 2024. 1. 17. 05:52

안개 / 조경숙

 

 

봄은 비를 타고 오는가 보다. 빗방울이 맺힌 곳마다 연둣빛 새순이 고개를 내민다. 금정산 초입에 들어섰으나 등산로 입구는 보이지 않고 철망에 걸린 입산 금지라는 팻말이 발목을 잡는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탓에 우산을 들고 땅만 보고 걷다 입구를 놓친 것 같다. 내원암에 가서 물어볼 요량으로 되돌아갔다.

“스님. 스님”

몇 번을 불러도 스님은 출타 중이신지 요사채는 비에 젖은 채 말이 없고 마루 밑에서 졸던 개 한 마리가 고개를 들고 눈을 껌뻑였다. 얼굴은 관음보살처럼 온화해 보이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사천왕을 만난 것같이 무서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뒷걸음쳤다.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법당으로 들어가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마루 밑에 있던 개가 멀찌감치 서 있는데 그 뒤로 등산로가 보였다. 내가 등산로 입구를 찾는지 어찌 알았을까. 개라면 주먹만 한 강아지도 두려워하는지라 머뭇거리고 있으니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언젠가 방송에서 등산로를 안내하는 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어디 사는 개인지는 기억에 없으나 혹 이 녀석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증명이라도 하는 듯 내가 빨리 걸으면 녀석은 잰걸음을 치고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면 녀석은 늦장을 부렸다. 때로는 혼자 신나게 오르막을 올라가다가도 잘 따라오는지 돌아보며 확인하니 우린 어느새 오랜 친구 같았다. 절과 점점 멀어지면서 은근히 걱정이 밀려왔다. 절에서 찾을지도 모를 일이고, 배낭에는 커피와 과일 몇 조각뿐이라 정상까지 간다면 허기질 녀석에게 줄 간식조차 없다. 입구에서 헤매기는 했으나 이 정도쯤 왔으면 이제 혼자서 얼마든지 갔다 올 수 있겠다 싶었다. 내려가라고 소리치며 손짓을 하니 녀석은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운다.

봄이라기에는 아직 바람이 차고 거세다. 뜨거운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앞서가는 녀석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머뭇거리다 바위에 걸터앉았다. 혼자서 신나게 올라가던 녀석이 돌아보더니 갑자기 ‘얼음 땡’ 놀이에 술래가 ‘얼음’이라고 외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하고 서 있다. 시선을 내게 고정하고 기다리는 녀석을 보니 보디가드가 따로 없다. 서둘러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니 그때야 ‘땡’하고 자기를 쳐준 것인 양 부동자세를 풀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이만한 호사를 누린 적이 있었던가.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고 녀석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마침 하산하는 등산객과 마주쳤다. 그 사람도 개를 무서워하는지 몹시 놀라는 표정이다. 순간, 개는 앞발을 치켜들고 살피더니 숲으로 들어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또 겁먹을까 봐 그러는지 시치미 뚝 떼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지혜롭기가 사람 못지않다.

은실처럼 가는 비가 오락가락 내린 탓인지 고당봉에 도착하니 운무가 수를 놓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안개가 조금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암반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봄은 아직도 산기슭에서 게으름을 피우는지 새싹은 고사하고 검불만이 바람에 날리고 돌에 얼음이 남아있어 미끄러웠다. 지금은 겨울잠에 취해 있지만 봄비의 재촉에 연둣빛이 득달같이 달려오겠지.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봄을 들이마신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 향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스며든다. 고려 시대까지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미 고(姑)에 집 당(堂)을 써 고당봉이라 했던가. 잠시 산신을 생각하는 사이에 녀석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짙은 안개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녀석이 잘 돌아갔는지 걱정이 되어 북문에서 원효봉으로 갈 계획을 접고 범어사로 내려왔다. 다시 내원암까지 올라갔으나 녀석의 흔적도 찾을 수 없어 잠시 기다리다 공양주를 만났다. 개 이야기를 했더니 놀랍게도 내원암에서는 개를 키우지 않는다고 한다. 금정암에 한 마리 있기는 하지만 길라잡이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고, 먼 내원암까지 올 리가 없다는 말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범어사가 있는 금정산은 관광객과 산행하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나였을까. 내가 올 것을 알고 내원암 마루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은 무엇인가. 산을 아무리 좋아해도 비 오는 날에는 외출조차 삼가는 나 또한 금정산에 끌리듯 왔다. 불가에서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업에 따라 육도 윤회한다는 말을 요럭조럭 퍼즐처럼 끼워 맞추어 본다. 우연이라 생각하려고 해도 적지 않은 혼란이 온다. 그쳤던 봄비가 다시 차창을 적시고 산야와 내 가슴은 온통 비안개 속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