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6

[좋은수필]낙타와 가시풀 / 박종숙

cabin1212 2024. 3. 30. 06:17

낙타와 가시풀 / 박종숙

 

 

흙먼지가 이는 벌판은 끝이 없다. 사방무늬를 그리듯 초록 풀 무덤이 점을 찍고 있는 땅에 작은 것은 바가지만 하고 큰 것은 함지박만 한 풀들이 듬성듬성 대 평원을 덮었다. 그 사막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몇 시간째 지천으로 깔려 있는 생명에 대해 의문점을 갖고 있었다.

"저 풀 이름이 무엇이죠?"

"소소초입니다. 중국말로는 초우타우차우라고 하죠."

흔히 낙타풀, 또는 가시풀이라고 하는 그 식물들은 감수성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력으로 물을 찾아 사는 식물 중 하나인 가시풀은 메마른 땅에서 몇 십 미터 또는 몇 백 미터까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다. 선인장들이 사막의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에 수없이 많은 가시를 달고 살듯이 가시풀들도 그랬다. 제 몸의 수분 공금처를 말려버린 표적들을 멍애처럼 달고 살았다. 그런 가시풀들을 낙타가 어느 것보다도 좋아한다니 이상한 노릇이었다.​

어쩌면 열사의 땅에서 힘들고 지칠 때문 목을 축일 수 있게 도와주는 그들을 낙타가 좋아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시에 찔려 입안 가득 피가 고이면서도 다른 풀들을 마다하고 가시풀만 고집한다는 게 의심스러워 나는 당장이라도 그 신기한 풀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일행들과 함께 이동을 하다 보니 버스를 세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며칠 후 일출을 보고 내려와 잠시 쉴 무렵이었다. 모래바닥에서 자라고 있는 가시풀이 저만큼 눈앞에 보였다. 달려가 보니 말 그대로 소소초에는 긴 가시가 잎과 잎 사이에 수없이 나와 있었다. 그것도 무딘 가시가 아니라 바늘처럼 예리한 가시였다. 가시에는 드문드문 조그맣고 빨간 꽃이 매달려 있는데 우리나라 싸리꽃과도 비슷했다. 별로 예쁘지는 않지만 낙타풀이 꽃을 피우는 봄이 되면 사막의 들판도 불그레하게 물이 들면서 황홀함을 연출한다고 했다.

특히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는 진정한 고비사막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 나라말로 고비란 뜻은 풀이 자라지 못하는 땅이란 뜻이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물은 낙타 말고는 없다. 안내자 말에 의하면 실크로드 시절엔 낙타 한 마리와 양 100마리를 바꿀 수 있었고 말 10마리와도 바꿀 수 있었다니 낙타의 생명이 금값으로 나가가던 시절이었다.​

낙타는 후각이 발달하여 1.5킬로미터 밖의 물도 찾아낼 수 있다. 특히 저녁때 사막에서 모래바람이 불어올 때면 긴 눈썹이 이중으로 되어있어서 눈을 뜨는데 전혀 지장이 없고 코와 귀에도 판막이 있어서 숨을 쉬는데 끄떡없다. 광풍이 불어닥칠 것도 미리 예견할 만큼 영리해서 사람에겐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낙타는 단봉탁타와 쌍봉낙타가​ 있는데 단봉낙타는 모래사막을, 쌍봉낙타는 자갈밭을 거뜬히 걸어 다닐 수 있다. 200킬로그램의 무게를 등에 질 수 있어서 사람이 이동할 때면 짐을 실어 나르는데도 편리하다. 낙타의 등에 난 혹은 영양 창고다. 그의 힘은 등에 있는 저장창고에서 나오게 되는데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에는 혹이 축 늘어졌다가도 봄이 되면 다시 풀을 먹으면서 살아난다고 한다.

드디어 내게도 모래사막에서 낙타를 탈 기회가 왔다. 우리 일행들은 일렬로 늘어선 낙타를 타고 명사산의 휴게소까지 올라갔었다. 낙타의 발은 물렁뼈로 된 데다 넓어서 푹 파인 모래바닥을 잘도 걸었다. 목이 길고 다리가 길어서 일어날 때와 앉을 때만 중심을 잡으면 내 몸의 무게를 잘 견뎌내는 것 같아 별로 겁이 나지는 않았다.

나는 눈이 커서 순하게 생긴 낙타가 대견해서 몇 번이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사람도 자주 먹는 음식을 좋아하듯이 가시풀도 낙타가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많이 제공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시풀은 낙타가 가지를 쳐 줌으로써 더 크게 자랄 수 있으니 둘은 공생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고슴도치 사랑을 불행한 관계에 비유한다. 가까이하면 할수록 상처를 입고 또 입히는 운명적인 관계, 그런 슬픈 사랑을 이들과도 비교하게 된다. 배가 고프고 물이 먹고 싶을 때면 상처를 감수하면서도 가시 풀을 찾지 않을 수 없는 낙타의 운명, 그런가 하면 타고난 몸의 가시를 버리자니 자살행동이 되고 가시를 달고 있자니 낙타에게 상처를 입혀야 하는 모순된 사랑을 하는 이들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토마스아캠피스는 "고통 없는 사랑에는 생명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버림받은 아픔 "고통의 밑바닥에서 생명의 신비를 찾았다"는 천양희 시인의 말이나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참고 감싸 안아야 한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처럼 사랑의 진실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고통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이들이 말해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돈황에서 투루판까지 이어진 사막을 달려가다 보면 끝없이 펼쳐진 고비탄의 가시풀들이 눈물겹도록 애잔해 보인다. 한여름이면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태양열 아래서도 낙타와 가시풀이 공생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참고 견디는 힘과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승화시켰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상생의 기적은 고통을 나누어 가졌기에 더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